▲죽령산신당 현액충북 민속자료 제3호인 ‘죽령산신당’은 조선 중기 관군이 죽령 일대의 도적을 소탕할 때 공을 세우고 전사한 한 다자구할머니를 그리기 위해 조정에서 사당을 세우고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김경진
윤 회장은 또 "세종실록지리지에 '봄가을로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죽령 국사당으로 내려 보내 작은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에 사학자들은 지금의 죽령산신당을 짓고 산신제의 틀을 갖춘 것은 대략 조선 중기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제사의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죽령산신당에 대한 깊은 믿음이 남아있어요"라고 했다.
나는 윤 회장에게 이 죽령산신제를 민간 차원에서 더욱 활성화시켜 무형문화재를 만들고 이를 관광자원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다자구 할머니' 이야기이러한 죽령산신당에는 죽령의 산신인 '다자구할머니'에 관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윤 회장은 그 유명한 다자구 할머니 설화를 이렇게 들려줬다.
"옛날 죽령고개에 산적들이 자주 나와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산적에게 두 아들을 잃은 어떤 할머니가 나타나 이 산적들을 잡는 묘안을 내놓았어요. 그것은 할머니가 산적의 소굴로 들어가서 산적들이 모두 자고 있으면 "다자구야", 안자고 있으면 "덜자구야"를 암호로 하여 관군에 알려주기로 한 작전계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목의 생일날이라 산적들 모두가 밀주에 취해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를 정탐한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치자, 관군들이 일제히 침투해 산적들을 모두 잡았답니다. 그 뒤 할머니는 홀연히 사라지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죽령산신이었어요...."윤 회장은 '죽령산신'에 관한 또 다른 설화도 들려주었다.
"산신 '다자구할머니'는 평강공주의 화신으로 낭군 온달장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 죽령으로 와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옛날에는 죽령산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단양·제천·청풍·풍기·영춘의 다섯 고을 관장이 제주가 되는 관행제였는데, 이 산신제를 소홀히 알고 지내지 않았던 풍기군수가 한밤중에 산신한테 잡혀가 곤장을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윤 회장은 다자구할머니와 관련된 전승가사도 소개했다.
다자구야 들자구야 언제가면 잡나이까?다자구야 들자구야 아직 오면 안 됩니다.다자구야 다자구야 소리칠 때 기다리소.다자구야 다자구야 그때 와서 잡으라소.사실 내 어릴 적 산신당이나 굿당의 이미지는 성스러운 곳이라기보다는 요괴가 있을 것 같은 으스스한 곳, 무당들이나 이용하는 무섭고 재수 없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관념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를 깨달은 것은, 기존 종교의 반사회적 비윤리적 모습을 보고난 후부터였다. 사랑·자비 등 훌륭한 교리의 가르침과는 달리, 부정과 비리를 통한 재산 증식과 패싸움 등 집단 이기적 욕망의 충족수단으로 전락한 종교의 모습들을 보고난 이후부터였다.
또 고소득 연봉, 성추행 등의 비윤리적 성직자들의 모습, 민족 고유의 정신문화를 배척하는 성직자들의 반사회적인 모습, 인류사회의 평화와 발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저승에서의 구원과 영생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인들의 모습, 타 종교를 무조건 비난·멸시하거나 이단으로 평가절하 하는 종교인들의 모습, 교주를 신격화 하거나 시한부 종말론과 심판설로 사회의 불안과 공포감을 자극하는 종교의 모습들을 보고난 이후부터였다.
다시 말해 기존의 종교가 타락되고 사이비화 되어가는 것을 보고, 비록 사라져가는 민족종교이지만 비교적 순수하고도 성스러운 산신교(?)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산신당 앞에서 합장하고 기원했다. 내가 기원한 것은 나 자신의 안위와 영달도 아니요 나라의 안녕과 번영도 아니었다. 오직 민족종교로서 그 전통문화의 명맥을 영구히 이어가라는 기원이었다.
죽령산신당을 뒤로하고 매바위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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