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에 걸린 '명문대' 합격 펼침막, 부끄럽네요

등록 2015.02.20 16:14수정 2015.02.2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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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정문 주변에 명문대 합격자 수를 홍보하는 펼침막이 게시됐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정문 주변에 명문대 합격자 수를 홍보하는 펼침막이 게시됐다. ⓒ 김동수


'서울대(2명) 최종합격(건축학과, 컴퓨터공학부)'


길을 걷다 우연히 모교 정문 주변에 걸린 2015 대입 합격자를 알리는 펼침막을 보게 됐다. 매년 학교 졸업식 즈음이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대학 합격자를 홍보하는 현수막 옆에는 이 학교 재학생이 토론대회에서 수상했음을 전하는 펼침막도 게시됐다. 펼침막의 내용만 다를 뿐이지, 다른 학교의 사정도 비슷할 것이다.

내가 이 학교를 졸업한 지도 꽤 됐다. 그 때도 역시나 특정 대학 합격자 수를 적은 펼침막은 존재했다. 서울대 합격생은 펼침막에 이름까지 기재되어 온 동네에 소개됐다. 때로는 동창회, 향우회 등이 명문대 합격 홍보 펼침막을 시내 곳곳에 게시했다. 서울대 합격자는 지역의 자랑이고, 학교의 자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거기엔 내가 다닐 대학은커녕 내 이름조차 쓰여 있지 않았다. 나의 존재는 '몇 명'의 대학 합격자로 포함됐을 뿐이다. 이 때문에 졸업 당시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매년 언론이나 시민단체에서는 명문대 합격 펼침막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한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감시한다. 하지만 변한 게 없다. 왜 그런 걸까.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소위 '명문대' 진학을 학교의 명예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학력·학벌주의를 대놓고 조장하는 것이다.

누구는 펼침막에 이름을 올리고, 또 다른 누구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현실에서 상당수 학생들은 이런 학교의 모습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더구나 대학 진학을 못한 학생들은 자연스레 학력·학벌주의의 피해자가 된다. 명문대 합격 펼침막은 학생 개개인이 가진 가치의 다양성을 학교가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대학 합격 홍보물 게시는 '명문고'라는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이런 목적이 과연 개별 학생의 인권보다 더 중요한 걸까. 학생들은 차별받지 않을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 그래서 인권위도 지난 1월27일 "차별적인 문화를 조성한다"며 특정대학 합격자를 알리는 펼침막 게시 관행을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그런데도 내 모교는 인권위의 촉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펼침막을 설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의 인권이 학교교육과정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학생인권조례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모교에 걸린 특정대학 합격 펼침막을 보기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서 광주 숭일고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대입 합격자 수 대신 졸업을 앞둔 3학년 재학생 413명의 이름 전부를 펼침막에 적어 학교 건물에 걸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학교가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학 합격자 홍보물은 성장기 학생들의 인격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하거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문제를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명문대 합격 현수막을 설치하는 것보다는 모든 학생들에게 지난 3년간의 학교생활에 대해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따뜻한 격려의 펼침막을 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펼침막 #대학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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