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고도의 후세들, 말과 마부(호도협에서)
양학용
멈춰 정착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난 아프다 다리(大理)로 떠나는 날이다. 나는 배낭을 둘러메고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이 순간부터를 좋아한다. 쿤밍(昆明)이 어떤 곳이었고 다리(大理)가 어떤 곳일까, 는 관계없는 거다. 그냥 어디론가 떠날 때가 좋은 거니까. 정확하게는 떠나 있는 시간 그 자체다. 출발과 도착, 그 사이에서 그냥 흘러가는 순간을 좋아하는 것이므로. 그러다 곧 어딘가에 멈추고 싶고 결국 멈추어서 정착 혹은 안정이란 것을 얻고 싶어질 테지만, 떠나 있는 이 순간만큼은 나의 시간이 나의 시간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경상도 사나이가 배웅을 한다.
"와, 처음부터 제가 가진 저 책 저자라고 말 안했십니껴? 그라모 더 잘해드맀실낀데."
그는 투박한 사투리로 아쉬워한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인 그의 등 뒤로 많은 사진들이 벽면에 붙어있다. 캄보디아 앙코르사원에서, 네팔 안나푸르나에서, 또 다른 어떤 여행지의 밝은 햇살 속에서 풋풋하고 자신에 찬 그가 서있다.
'사진 속 당신, 참 좋아 보이네요. 지금처럼 외로워 보이지도 않고요. 여행자는 길 위에 서야 비로소 존재감을 얻는 모양이지요.'
내 마음 속 언어는 마땅한 집을 얻어 태어나지 못한다. 전날 밤에, 다리(大理)가 그렇게 좋으셨다면서 왜 쿤밍(昆明)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는지 물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따리, 좋지요. 근데 거기 촌구석에다 게스트하우스 했으면 아마 그만두었을 겁니다. 좋은 것도 마, 하루 이틀이지. 여가 좋십니다. 중국어 배우기도 좋고, 또 들락거리기도 편하고요."
나의 경우, 멈추어 정착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내 삶이 딱딱해지기 시작하면 아파온다. 심장이 조여오고, 호흡이 곤란해지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피 같은 한숨을 토해내는 날들이 많아진다. 일찍이 알아차린 것이긴 하나, 이건 병이다. 심각하고 치명적인, 그래서 고칠 수 없거나 고치려고 하지 않는 병. 여기 아마도 나랑 똑같은 병을 가진 한 사나이가 어설픈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