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면 손죽도 바다를 지키고 있는 이대원 장군 동상의 모습
심명남
해 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건너와외로운 병사 힘 다해 끝나는 인생 슬프다나라와 어버이 은혜 갚지 못해원한이 구름에 엉켜 풀길이 없네428년 전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절명시입니다. 요즘 인기사극 <징비록>에 손죽도가 자주 등장합니다. 임진왜란 5년 전, 왜구들이 조선침략의 전초전으로 남해안을 드나들면서 납치와 약탈을 자행한 손죽도. 이곳에서 잡은 왜구를 한양으로 압송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손죽도 섬마을에는 충렬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대원 장군의 넋이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역대 가장 젊은 나이 21살 때 녹도만호가 된 그는 1587년 전라남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교지를 받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22세의 나이에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장군은 사후 병조참판으로 특진합니다.
이대원 장군은 손죽도해전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패전에 앙심을 품은 왜구는 대규모 2차해전을 준비합니다. 1차해전에서 대승한 장군은 왜장을 잡아 직속상관인 수군절도사 심암에게 압송하는데, 이 과정에서 장군의 전공을 가로채려는 심암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창피만 당한 심암은 1587년 정해년 2차 침입 때 이대원 장군에게 억지 출전 명령을 내립니다. 명령을 받은 장군은 지원군 없이 출전해 3일간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전사합니다.
이후 효수형에 처해진 심암. 이순신 장군은 이대원 장군을 잃은 것은 '국가의 큰 손실'이라하여 이 섬을 잃을 '손'(損) 큰 '대'(大)자를 써 손대도라 불렀습니다. 이후 손죽도(巽竹島)로 바뀌었습니다.
싸움이 끝난 후 손죽도 주민들은 해안가에 밀려온 장군과 병사들의 시신을 섬에 고이 묻고, 지금까지도 넋을 기리며 제를 지내왔습니다. '손죽도 이대원 장군 보존회'에 따르면, 20여 년 전에는 손죽도 주민들이 이대원 장군의 종친회를 찾아가 '손죽인들은 400여 년 동안 장군의 제를 모시고 있는데 종친회에서 한번도 찾아보지 않는다'고 따졌습니다.
이후 종친회에서는 묘지에 묻힌 이가 이대원 장군인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묘지를 파보니 정말 시신의 흔적이 발견돼 곧바로 장군의 묘를 새롭게 조성했습니다. 올해는 그곳에 공원도 조성됩니다. 지금도 손죽도에는 긴 칼을 찬 늠름한 장군이 남해바다를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5월 '손죽인의 날'을 맞아 이대원 장군의 동상 제막식을 갖는 뜻 깊은 행사도 열립니다. 동상을 기부해 직접 제작에 나선 손죽인 이민식씨의 말입니다.
"손죽도는 호국과 충절의 섬입니다. 거문도를 찾는 관광객이 1년에 17만 명인데 이곳을 잘 모르고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서 손죽도 여객선이 닿는 곳에 4m 높이 26톤 가량의 동상을 해외에서 제작 중입니다. 이대원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대나무 숲을 지나 손죽도 정상에 올랐습니다. 멀리 펼쳐진 손죽열도에는 사이 좋은 이웃 섬이 여럿입니다. 유독 아열대 기후로 사시사철 나무가 많은 소거문도, 평도, 광도를 가기 위해서는 손죽도에서 다시 배를 타야합니다.
여행객 녹이는 손죽도 '약막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