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기자의 그림 기사.
김병기
가슴 뛰는 뉴스가족 시민기자단은 1년에 두 번 취재수첩을 들고 산과 계곡, 강과 바다를 누볐다. 슬리퍼를 신고 지리산을 올랐다. 전국 국립 박물관과 유명 전시관에도 갔다. 셔터 내리는 것을 멈춰달라고 애원하면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독차지했던 적도 있다. 맛집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싼 가격에 산해진미도 맛보았다. 새하얀 별빛 아래에서 캠핑하면서 참숯에 구워먹는 돼지 목살은 일품이었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느낀 감동을 취재 수첩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국 여행지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취재 장소였다. 해수욕장에서, 눈썰매장에서 정신없이 놀면서도 즐거움을 기사에 담았다. 그곳에서 마주친 장면은 싱싱한 뉴스였다. 우리는 일기를 쓰듯 A4용지에 놀이와 감동을 담았다. 산과 계곡, 모텔과 텐트 속, 때로는 자동차 안에서 연필과 볼펜, 그리고 색연필로 총천연색 신문을 만들었다.
매일 저녁에 기사를 쓰는 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뒤에 사나흘이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기에 순간의 느낌을 살릴 수 없었다. 집에 와서 기사로 정리하자면 큰 공사를 벌여야 했다. 결정적으로 여행 가방에 넣고 다닐 노트북이 한 개 밖에 없었다. 손 글씨로 가족신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전략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이었다. 이제와 펼쳐보니 손맛이 느껴지고 우리 체취를 담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럼 나는 1년에 두 번씩 아빠 노릇을 제대로 했을까? 아이들의 황당한 글을 보고 어이없기도 했지만, 녀석들은 아빠의 글쓰기 선생님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글을 쓰면서 바람과 나무, 땅과 하늘조차 의인화하는 어린 눈높이를 배웠다. 그 눈높이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인다는 이치도 새삼 깨달았다. 아이들은 나에게 색다른 시선과 세심한 묘사를 선물했다.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굳어진 기사쓰기 공식을 파괴하기도 했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1인칭 화법으로 자기 느낌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실험했다. 아이들의 글도 나아졌다. 피카소 추상화 같은 그림 한 장과 글씨 한 줄 써놓고 기사라고 우기던 막내 글과 그림이 신문 호수가 올라갈수록 발전했다. 여행지에서 정신없이 뛰어노는 큰 딸의 그림과 글쓰기도 빛을 냈다. 주어와 술어가 따로 놀거나 파편적인 말을 구사하던 녀석들이 자기감정을 글에 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