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발표한 성명서 중 일부. 사건 조작·은폐에 가담한 경찰 간부들의 이름이 적시돼 있다.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제공
언론보도에 떠밀려 조작·은폐 윗선 수사 나섰지만...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사건 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은 대공수사2단장 전석린 경무관,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 홍승상 경감 등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의 실명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5월 22일에서야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5월 22일자 <동아일보>는 "박처원 치안감 등 치안본부 간부들이 개입해 두 명으로 축소·조작했고, 1월 말경 구속된 조한경 경위 등이 심경변화를 일으키자 계속 조 경위를 면회하면서 입을 막으려 했다"고 보도했다.
사제단은 당시 성명서에서 "검찰이 이같은 사건 조작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밝히지 않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를 증명하듯 박 검사는 이러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기까지 강진규 경사(5월 20일)와 반금곤 경장(5월 21일)을 조사했지만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을 제대로 추궁하지 않았다. 강 경사나 반 경장 신문은 추가 고문경찰관들의 물고문 과정을 캐묻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 수사는 1차나 2차 모두 부실했던 것이다.
그나마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의 실명이 언론에 보도된 뒤에는 조금 진전된 태도를 보였다. 박 검사는 5월 23일 황정웅 경위와 이정호 경장을 신문했는데, 이정호 경장에게는 "전에 피의자에게 허위진술을 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이 경장이 "조한경이 짠 대로 하면 된다고 했다"라고 답변하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또한 박 검사는 황정웅 경위에게는 최초 심장 쇼크사로 보고하게 된 경위를 물으면서 "누가 그런 보고내용('턱 하니 억 하고 죽었다')을 만들었냐?" "위와 같은 보고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상급자들이 다 알고 있었나?"라고 추궁했다. 이어 박 검사가 "사고 후 상급자들과 이야기한 일이 있나?"라고 묻자 황 경위는 "유 과장과 박 계장을 사고 후에도 사무실에서 평상시와 같이 만났으나 그들은 사고경위를 물어본 일이 없다"고 답변했다.
이미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전석린-유정방-박원택-홍승상'이 개입했다고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고경위를 물어본 일이 없다"라는 황 경위의 답변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박 검사는 이를 반박하지 않았다. 이어 "유 과정과 박 계장 외에 전석린 단장이나 그 외 상급자들을 만난 일이 있나?"라고 물어본 정도다. 이에 황 경위가 "없다"라고 답변하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1차 수사팀에 참여했던 박 검사가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발표한 성명서 내용을 지나쳤을 리 없다. 그런데도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의 실명이 언론에 보도되기까지는 '윗선'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언론보도 이후 여론에 떠밀려 뒤늦게 윗선 수사에 나섰지만 그것조차도 부실했다.
2차 수사에서도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없었다김수환 추기경은 5월 26일 명동성당 특별강연에서 수사팀 교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야당에서도 "새로운 수사진이 원점부터 재수사해야 한다"라고 압박했다. 결국 이종남 신임 검찰총장은 취임식 직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대검 중앙수사부(아래 '중수부')로 이첩하라고 지시했다. 검찰 수사가 국민으로부터 불신받자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신창언-안상수-박상옥' 등 기존 수사팀은 대검 중수부 수사팀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사실상 '강등'됐다.
새로운 수사주체인 대검 중수부 수사팀은 5월 29일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사건을 이첩받은 지 이틀 만이었다. 검찰은 박처원 처장과 유정방 과장, 박원택 계장을 범인도피죄로 구속했다. 조작·은폐에 개입한 윗선을 '박처원-유정방-박원택' 선에서 잘라버린 것이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경우 "범인 축소·조작에 가담한 혐의가 전혀 없다, 그만둘 때까지 축소·조작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라고 결론내렸다. 또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했다고 지목한 전석린 단장과 홍승상 계장도 무혐의 처리했다. "꼬리 자르기 수사"나 "봐주기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수사팀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열린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했는지, 어느 정도까지 개입했는지 등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열린 관계기관대책회의에는 안기부장과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청와대 정무1수석 등이 참석했다. 관계기관대책회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통제탑(control tower)으로서 검찰과 경찰 수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009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관계기관대책회의 은폐·조작 의혹>이란 보고서에서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역할을 이렇게 결론내렸다.
"검찰, 경찰 수사에 영향을 행사한 사실과 검찰의 수사권을 제한하거나 방해한 점을 확인할 수 있었고, 경찰의 은폐․왜곡된 수사결과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 사건 초기 기소권이 있는 검찰의 직접수사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찰 치안본부로 수사주체가 바뀌는 과정이나 추가 공범 3인을 알고도 이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안기부장,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개입한 점이 확인된다."검찰은 이미 3월 21일 관계기관대책회의로부터 '재수사 불가'를 통보받은 적이 있어서 관계기관대책회 개입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문제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진실화해위는 앞서 언급한 보고서에서 "검찰이 사건의 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직무를 유기하여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국민에게 은폐 사실이 폭로된 이후에야 추가 공범을 포함 치안본부 관계자 등 은폐에 가담한 책임자를 최소한만 기소하여 결과적으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부당한 개입을 방조하고 은폐한 잘못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대검 중수부 수사팀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회유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2억 원의 출처도 제대로 캐지 않았다. '안기부 비자금설'이 제기됐지만 수사팀은 "박처원 치안감 차원에서 경찰 수사공작비에서 마련한 돈이다"라며 더 이상 수사하지 않았다.
3차 수사까지 이어졌다는 것 자체가 '부실수사' 증명지난 1988년 1월 12일 <동아일보>는 박종철 열사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검찰에서 물러난 안상수 전 검사 등을 인터뷰해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외압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개입 의혹을 보도했다. 대검 중수부는 다음날(1월 13일) 바로 재수사('3차 수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5일 강민창 본부장을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앞선 2차 수사에서 강민창 본부장을 무혐의 처리한 바 있다. 그런 강 본부장을 구속함으로써 검찰은 스스로 부실수사를 인정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차 수사(4일), 2차 수사(9일), 3차 수사(3일)까지 거치고서야 일단락됐다. 짧은 수사기간은 물론이고, 3차 수사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검찰의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1차 수사는 경찰의 수사 결과를 추인하는 수사였고, 2차 수사는 김승훈 신부의 폭로 내용에도 미치지 못한 수사였고, 3차 수사도 언론보도에 떠밀린 수사였다. 인권의 최후 보루를 자처해온 검찰이 독자적으로 개척한 수사는 전혀 없었다.
이렇게 부실한 수사의 책임에서 박 검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학규 민주열사 박종철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5공화국 대표적인 인권유린사건 중 하나인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조작 사건의 수사검사가 대법관이 된다는 것은 당시 인권유린의 부당성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박종철 열사를 또 다시 죽이는 행위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지난 1987년 5월 18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으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라고 적시했다. 그 중대한 사건을 두 차례나 수사했던 박상옥 검사가 부실수사 책임 논란에 어떻게 답변할지 오는 7일 대법관 인사청문회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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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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