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손으로 심은 상추, 골목 곳곳 '정겹다'

합정동 골목길 도시농업 "마을 전체가 맑고 밝아졌으면 좋겠구나"

등록 2015.04.29 11:25수정 2015.04.2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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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동 경기 어린이집 아이들이 손수 식물에 물을 주고 있다 ⓒ 고석용


날 심어준 지혜에게.


안녕 지혜(가명)야. 난 상추 모종이야. 지난 27일 아침에 네가 작은 손으로 날 심어줬지. 그날은 정말 뿌듯한 날이었어. 처음에 날 데려간 아저씨들이 탄 트럭엔 '합정동 주민센터'라는 글씨가 선명했단다. 웬 공무원 아저씨들이 날 데려가는 거지? 처음엔 어리둥절했지.

알고 보니 합정동 주민센터(동장 신승관) 아저씨들이 진행하는 '골목길 도시농업' 사업의 일환이었더구나. '정겨운 골목길 만들기 프로젝트'라는 이름이래. 지혜 같은 유치원 아이들이 버려진 페트병 화분에 날 심어서 가꾸면, 너희도 자연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골목도 예쁘게 변한다는 취지란다. 거기다 4주 뒤에 나를 수확해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드리기도 할 거래. 단순히 밥상에 오르는 일 외에도 내가 할 일이 또 있었다니. 정말 신나는 일이지 뭐니.

트럭이 합정동 '경기 어린이집' 앞에 섰다. 4살짜리 꼬마들이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지혜 너도 걸어 나오는구나. 너희들은 그때 독특한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어. 전화번호나 상표도 적혀 있었지. 버려진 폐현수막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야. 알록달록한 게 생각보다 예뻤단다. 내가 심어질 화분도 남달랐어. 너희가 버려진 페트병을 직접 색색으로 다시 칠해서 만든 화분이었지. 프로젝트에 '재활용'의 개념이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었어.

앞치마 두른 4살 아이들, 페트병에 상추를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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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어린이집 아이들이 화분에 손수 식물을 심고있다. ⓒ 고석용


지혜야, 너희는 흙을 만지니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나 봐. 까르르 웃음이 입에서 떠나질 않았거든. 맨날 아스팔트 바닥에서 플라스틱 장난감만 만지고 놀던 네가 흙과 나를 직접 만질 기회는 많지 않았을거야. 너도 친구들도, 나도 더 싱그러워진 기분이었어. 어린이집 박영희 원장도 "아이들이 직접 손수 참여하는 이번 프로젝트의 취지에 공감한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시더구나.


내가 심어진 페트병 화분은 어린이집 담장에 설치됐단다. 어린이집 푸른 벽이 알록달록 더 환해졌어. 좋은 효과가 있는데도 아무 데나 나를 심어놓을 수는 없었대.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야. 우선 주차구역이 아니어야 한대. 자동차가 우리를 가려버리거나 매연이 심하면 우리가 잘 자랄 수 없거든.

두 번째론 햇빛이 잘 들어야겠지. 우리가 아무리 그늘에서도 잘 자란다 해도, 최소한 빛은 들어와야 하잖아. 마지막으로는 물을 주고 나를 잘 관리해줄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해. 이 세 가지 조건 맞추기가 생각보다 쉽지가 않은가 봐. 합정동 주민센터 최국모 주무관이 이 조건을 다 갖춘 골목을 찾느라 고생 좀 하셨다네.

지혜야, 상추인 내가 봐도 담장 화분은 정말 좋은 생각인 거 같아. 사람 살 곳도 없다는 서울에 사실 내가 자랄 땅은 구하기 쉽지 않잖아. 그래서 합정동 주민센터는 나를 담장에 설치하려고 한 거래. 단순히 텃밭이 아니라 이렇게 담장 화분을 이용하면 또 다른 효과도 있어. 사람들에게 내가 미모를 뽐내면 쓰레기도 줄어들고 범죄 예방도 된단다. 옆 동네 마포구 염리동 '소금길'이 디자인으로 범죄를 예방한다고 하는데, 합정동에서는 내가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지.

소소한 행사에 내가 너무 들떴나. 근데 정말 신나는 일인걸. 요즘 사람들 참 식물이랑 친하지 않잖아. 식물과 어울릴 장소가 마땅치 않거든. 아파트나 골목 화단은 이미 꽉 차있고, 고작해야 베란다 화분이 전부니까. 거기에 이렇게 저비용으로 골목길 미관도 꾸밀 수 있잖아. 최 주무관은 이 프로젝트 전체에 사용된 비용이 30만 원도 채 안 들었다고 하더라고.

사실 동네가 변하는 건 이렇게 조그만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는 거란다. 꼭 동네에 백 몇 층 짜리 건물이 들어오거나, 어마어마한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만은 아니야. 이런 작은 움직임이 결국엔 동네 분위기를 만들고 환경을 변화시킬 거야. 고작 담장에 화분 놓는 걸 가지고 무슨 동네 분위기가 바뀌겠냐고? 독일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그랬잖아,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작은 상추. 이런 게 디테일 아닐까.

지혜야, 우리 동네가 어떻게 달라질 것 같니? 그리고 너는 매일 엄마와 이 길을 지나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지금은 합정동 토정로 3안길, 경기 어린이집 담벼락, 성산초등학교 담벼락에서 우리를 만나볼 수 있지만 합정동 사람들은 프로젝트를 더 확대할 예정이래. 앞으로 골목 곳곳에서 상추랑 꽃을 많이 마주치게 될 거야. 마을 전체가 지혜처럼 맑고 밝아졌으면 좋겠구나. 내일도 물 주러 와서 환한 얼굴 보여주렴! 그럼 내일 보자. 안녕 지혜야!

합정동 경기 어린이집 앞 담장에 심어진 상추가.
#합정동 #도시농업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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