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방음부스를 제작해서 판매하던 상원씨. 큰돈을 벌었지만 철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 서울로 갔다.
매거진군산 진정석
2007년 봄, 상원씨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삼촌한테 돈을 빌렸다. 군산시 대야면에 있는 30평짜리 공장을 빌려 방음부스 회사를 차렸다. 전국에 방음부스 회사가 네 곳뿐이던 시절, 상원씨는 톱밥을 압축한 피비판으로 직접 제작했다. 처음 두 번은 실패. 재룟값 천만 원을 까먹었다. 상원씨는 담담했다. 뭔가를 배운다면, 시행착오를 겪는 게 당연하니까.
혼자 연주하기에 딱 좋은, 가로 2미터에 세로 2미터짜리 방음부스. 미술을 전공한 덕에 디자인에 더 신경 쓴 상원씨의 방음부스는 인기를 끌었다. 색소폰 연주가 유행하던 때라 7백만 원짜리 물건은 인터넷 판매가 잘 됐다. 이사를 가더라도 떼어 갈 수 있고, 중고로 팔 수 있는 방음부스. 주문이 하루에 3천만 원어치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회사 차릴 때 삼촌한테 빌린 돈은 다 갚았다. 꼬박 2년 동안 방음부스 만드는 일을 한 상원씨는 벌어놓은 돈도 제법 됐다. 그때 상원씨 아버지가 공장으로 찾아왔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재단하며 몸 쓰는 일을 하는 아들을 봤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아직까지는 네 뒷바라지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미술 공부를 더 해라"고 했다.
"공부를 더 한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건 아니죠. 근데 흔들리더라고요. 맨날 공장에서 혼자 일했어요. 방음부스가 워낙 비싸서 날마다 주문이 들어오는 건 아니에요. 직원을 두고서 다달이 월급 줄 형편은 못 됐죠. 젊으니까,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어요. 작가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사람이 잘 될 때는 뭐든지 다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회사를 정리하고 남은 돈 1억. 스물아홉 살 청년 상원씨는 서울로 갔다. 홍익대 미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큐레이터 일을 하는 동생 경민씨가 있어 집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조소 전공을 살려 미니어처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다. 박물관마다 전시되는 각종 전쟁 장면 미니어처를 만들었다. 작품하는 기분으로 다녀 밥벌이가 고달프지도 않았다.
다음 해 봄, 상원씨는 작업을 활발하게 하는 성신여대 대학원 거리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여대라는 환상도 작용했다. 집하고 가까운 것도 장점이었다. 공부하면서 개인전과 단체전 전시회를 여러 번 했다. 거리 조형물 변형 작업도 진행했다. 군산시 옥산면 산업 계장이던 아버지의 요청으로 군산 청암산 어귀의 소 작품과 토끼 피규어도 만들었다.
"청암산은 수십 년간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이었어요. 전혀 훼손되지 않고, 원래 모습대로 살아 있는 곳이죠. 아버지는 은파(도시 안에 있는 군산의 큰 유원지)처럼 접근이 쉽게 길을 낼까도 고민하셨죠. 저는 생태 그대로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자연 속에서 걸을 수 있는 몇 개의 청암산 코스를 만드셨어요. 지금은 군산 구불길이 됐죠."아버지의 빈 자리... 새로운 삶을 시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