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리콴유 전 총리가 작고했다. 그는 1959년부터 1990년까지 31년 집권 기간 동안 싱가포르를 부패하고 낙후된 신생국가에서 깨끗하고 발전된 강소(强小)국가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식민종주국이었던 영국을 앞지른 상황이 되었다. 서구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도 그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어느 저명한 정치학자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힘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지도자의 신념과 행동에서 나온다고 했다. 리콴유 전 총리는 부패척결과 압축성장을 동시에 추진하는 신생 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강압적이었다. 그러기에 일부에서는 그를 아시아의 히틀러, 아시아의 무솔리니라고 비난한다.
그렇지만 리콴유의 지도력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싱가포르 모델'은 극히 작은 국가규모,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는 불리한 지리적 위치 속에서 선택한 '생존의 정치'(politics of survival)의 산물이다. 나아가 '탈식민-건국'에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냈다. 비자유주의적 방식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과 개방경제를 결합시켰다. '아시아식 사회주의' 선행모델의 측면을 갖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19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싱가포르는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서 수출, 수입업 등 여러 업종의 역내 중심지가 되었다. 식민지 싱가포르 안에서 말라야 공산당(MCP)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조직 노동자들의 교섭력도 커졌다. 식민당국은 노조간부들을 체포, 투옥했지만 노동운동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3년여의 일본 강점기간이 끝나자 항일투쟁을 주도하던 말라야 공산당의 위엄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식민지 행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영국 식민당국이 말라야 공산당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말라야공산당의 영향력 하에 있는 말라야총노조는 싱가포르의 기간산업을 멈출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졌다. 이에 식민당국은 불법화로 맞섰고, 마침내 말라야 공산당 초토화에 나섰다.
1954년 공산주의세력들에게 정치적 안전판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대중조직을 얻은 인민행동당(PAP)이 출범하였다. 창당대회에서 리콴유는 식민주의의 종식, 민주정부의 수립을 천명했다. 리콴유가 이끄는 세력은 지구당 기반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지도부를 장악했다. 당내 투쟁에서 열세에 몰린 공산주의세력들이 탈당하자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PAP)은 '생존이데올로기'(ideology of survival)를 내세워 경제성장을 위한 정치안정과 국민단합을 역설하였다.
강소국가 싱가폴의 출발
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이연방으로부터 탈퇴했다. 140년의 영국 식민 지배를 청산한 데 이어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 출범한 것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뒷걸음질 치는 경제, 높은 실업률로 고전 중이었다. 특히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양 강대국들부터의 위협과 갈등 속에서 불안한 미래를 마주하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생존을 위해 보다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PAP 논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PAP가 추구한 경제생존 전략은 국가주도의 외자의존적, 수출지향적 산업화였다. 리콴유의 PAP 정부는 항구, 공항, 텔레콤산업, 기타 공공시설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간접자본 육성에 적극 뛰어들었다.
이와 동시에 외국계 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유치를 천명하고 나선 PAP는 고임금구조가 성장에 불리한 조건이라고 판단했다. 실질임금 억제를 위해 독립노조를 제거한 것이다. 또 전국노조연맹(NTUC)의 간부들 중에서 PAP 반대세력을 축출하였다. 파업은 '반사회적 행위'로 규정되었다. 공산주의계열의 노조는 물론이고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세력이 제거되었다. 노조간부들의 상당수가 PAP 당원이 되고 또 의회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PAP가 이같은 강압과 회유 방식으로만 '산업평화'를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리콴유 정부는 주택개발청을 통해 인구의 대다수가 공공주택에 거주하도록 하는 과감한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지속적인 주택공급에 힘입어 독립 전후 시기 심각했던 주택난이 해소되었다. 여기에다가 주택보급정책은 일자리 창출효과도 수반하였다.
리정부는 국민통합을 위해 종족간 화합정책도 추진했다. 모든 종족, 언어의 동등성 원칙을 천명하고 다종족, 다언어정책을 실행했다. 내각에도 소수종족 출신의 자리를 배려하였다. 반면 종족 극단주의자들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엄격히 처벌되었다.
능력본위제 관료제와 청렴한 공직문화
PAP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관직사회를 일대 혁신해서 정착된 능력본위제(meritocracy)의 관료제와 청렴한 공직문화였다. 공무원들의 급여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하여 민간부문의 급여 수준과 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조정했다. 하지만 특정 공무원이 부정부패에 연루될 경우 해고와 동시에 연금까지 압수되었다. 부정행위로 불명예 퇴직한 공직자는 민간부문도 꺼려하였다.
이러한 독직행위에 대한 가혹한 대가는 공무원들의 부정행위 예방 효과를 거두었다. 리콴유는 공직사회에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고위공직자의 청렴성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리정부는 '부정부패방지법'과 '부패행위조사국'을 재정비하고 부정부패와의 전면전쟁을 전개하였다. '싱가포르 모델'이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진리에 반하는 사례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리정부는 시민사회와의 전면전쟁도 같이 벌였다. 정부에 대한 비판을 국가이익과 국가안보를 해치는 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탄압했다. 모든 언론매체들을 당과 정부의 통제 하에 두었다. 자연히 자기검열문화가 생겨났다. 또 리정부는 시민사회가 넘어서는 안 되는 참여의 범위를 제시했다. 만일 이를 어겼을 때는 재판없이 구금하거나 소송을 걸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파산에 이르게 하였다.
여기에다 싱가포르 중간계층의 보수성도 시민사회의 저발전에 기여하였다. 싱가포르 국민들의 꿈은 3C로 표현할 수 있다. 컨트리 클럽(country club), 콘도미니엄(condominium), 자동차(car)이다. 이들로부터 민주주의나 정치적 자유와 같은 공론적 사안보다 사생활의 풍요로움을 우선시하는 문화를 보게 된다.
리콴유는 이러한 PAP의 정치독점을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한 '아시아식 민주주의'로 정당화하였다. 1994년 <포린 어페어즈>에 실린 편집장 자카리아와의 대담에서 리콴유는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가치관의 기초한 근검절약, 충, 효야말로 자신보다는 국가와 가족을 우선시하는 동아시아 문명의 기본 윤리라는 것이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의 총기, 마약, 폭력 등과 같은 사회문제는 무정부사회로 추락할 수 있는 극단적 자유주의, 개인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국가발전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규율(discipline)이며, 너무 많은 민주주의는 발전을 방해하고 무질서를 야기할 할 뿐이라고 본 이가 리콴유였다. 싱가포르의 독특한 태형(笞刑) 제도는 싱가포르의 규율정치를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리콴유 이후 싱가폴의 운명
리콴유가 완성한 '싱가포르 모델'은 한국, 대만 등이 경험했던 개발독재모델, 발전국가모델의 일환으로 얘기된다. 하지만 리콴유가 이끈 PAP가 공식적으로 영국 노동당으로부터 배운 사회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추진한 당-노조의 정치적 연계, 국가자본주의, 주택공급정책과 같은 복지정책이 이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 우익독재와 좌익독재의 요소가 혼합된 '싱가포르 모델'은 일당제라는 정치적 독점체제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통해 추격성장에 성공하려는 중국, 베트남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 역시 식민지, 탈식민과 건국, 그리고 개발의 시대를 거쳤다. 이러한 대격변기에 리콴유의 PAP 정부는 강압적 방식으로 국민통합을 이끌어내고 전세계가 주목하는 '산업혁명'을 일구었다. 이 과정에서 리콴유와 그의 동료들은 싱가포르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지적으로 미성숙한 존재로 보고 국익과 국민의 이익을 독단적으로 규정하였다. 일상적인 정치참여 범위도 제한했다. 국민들은 이들 엘리트들에 의해 훈육되고 계도되는 대상이었다. 일각에서 싱가포르 국민들을 두고 황금새장 안의 새라는 비유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엘리티즘에 기반한 계몽독재를 리콴유는 '아시아적 가치', '아시아식 민주주의'로 정당화하였다.
탈식민 시기 비서구 국가들은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 시기를 맞았다. 그러나 계몽독재의 다른 이름인 교도민주주의 하에서 경제기적을 이룬 예는 많지 않다. 싱가포르는 한국, 대만과 같이 그 소수의 사례에 속한다. 그렇지만 개발의 시대에 이어 민주화 시대에 들어간 한국, 타이완과는 달리 싱가포르에서는 교도민주주의가 지속되었다. 이는 정부로부터 자율적인 시민사회가 미성숙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교도민주주의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리콴유 사후(死後) 그의 정치적, 생물학적 후계자인 현 리센룽 총리가 민주화 시대를 여는 초석으로서 위로부터의 정치개방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독립적인 시민사회의 탄생을 허용할지가 주목된다. 물론 이러한 싱가포르의 진화방향과 미래를 '아시아식 사회주의'의 선행모델로서 주시해보는 것도 흥미로움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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