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골당에 안치된 황씨. 23살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그의 명복을 빈다.
유미자
그러던 2005년 5월 30일. 월요일이었던 그날, 인희씨는 밀린 업무를 하기 위해 밤 10시까지 야근을 했다. 그리고 같은 부서 직원과 퇴근하면서 그의 차를 타고 경기도 성남 분당 인근 전철역까지 동승했다.
그런데 목적지에 내리자 그곳에서는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과장 이씨였다. 동료에 따르면, 인희씨가 당황해하는 사이 이씨는 납치하듯 팔을 강제로 잡아 끌며 이씨의 차로 끌고 갔다. 그러자 인희씨가 저항했고 이를 본 남자 동료 직원도 이씨에게 "밤도 늦었는데 내일 이야기 하시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이씨가 그 직원에게 "참견하지 말라"며 일갈했고 그는 물러났다. 이내 차는 출발했다. 그것이 인희씨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날 밤, 인희씨의 어머니 유미자씨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딸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야근한다며, 조금 늦게 집에 간다던 딸은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안절부절하던 사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됐다. 여전히 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다음날인 5월 31일 아침 8시 35분경, 유미자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인희씨의 회사 팀장이었다. 당시 팀장은 유미자씨에게 두서 없이 다급한 말로 "인희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데 지금 집에 있냐?"며 말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하는 회사에서 아침 8시 35분에 집으로 전화하여 직원의 행방을 찾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유미자씨는 전날 밤 이씨가 인희씨를 납치한 것을 팀장이 알고 난 후 이를 떠보기 위해 전화했다고 생각한다. 전날 인사과장이 인희씨를 강제로 끌고 간 것을 본 동료 직원이 이를 팀장에게 보고하자 어찌된 것인지 떠보려고 전화했다는 것이다.
이에 유씨가 전날 밤 인희씨가 귀가하지 않았다며 행방을 물었지만, 팀장은 인사과장의 납치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면 경찰에 신고라도 했을 텐데... 인희씨의 가족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딸의 행방만 찾았다. 그리고 유미자씨가 끔찍한 비보를 듣게 된 때는 실종 48시간이 지나던 6월 1일 밤 10시 30분이었다.
한 통의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다. 전화를 한 곳은 강원도 원주경찰서. 그리고 듣게 된 끔찍한 딸의 사고 소식. 경찰 발표에 의하면 사건은 2005년 5월 31일 새벽 12시 30분경 발생했다. 경기도 분당에서 인희씨를 강제 납치한 이씨는 이후 경기도 양평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희씨를 살해한다.
유미자씨가 보여준 피해자 인희씨의 모습은 끔찍했다. 경기도 양평의 한 야산에서 이씨는 인희씨를 추행했다. 상의 가디건과 하의 속옷은 벗겨졌고 치마는 반쯤 벗겨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인희씨가 극렬하게 저항해 뜻대로 되지 않자 이성을 잃은 이씨는 인희씨를 무참히 살해했다.
경찰이 촬영한 사진 속에서 인희씨의 긴 머리는 흘러내린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범행이 벌어진 이씨의 차량 안에는 사방에 피가 튀어 있었고 인희씨의 몸은 상처 투성이였다. 차마 세세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렇게 예쁜, 그렇게 착한 유미자씨의 희망 인희씨가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한편 이씨는 인희씨를 살해한 후 양평 야산에 시신을 유기하고 도주했다. 유미자씨가 딸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애태우던 이틀간 살인범 이씨는 도주 중이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사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연 관계를 추궁'하여 밝힌다는 경찰?도주하던 이씨가 자수하면서 사건 전모는 밝혀졌다. 그런데 그가 자수한 곳이 참으로 묘했다. 그는 납치를 시작한 분당도 아니고, 또 사체를 유기한 양평도 아닌 강원도 원주로 가서 자수한다. 그리고 이씨의 자수를 접수한 원주경찰서가 이 사건을 맡았는데 이는 대단히 드문 사례였다. 통상 사건이 발생한 해당 지역으로 사건을 이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자수를 접수한 원주경찰서가 맡았다. 유미자씨는 지금도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씨는 왜 사건과 상관도 없는 강원도 원주까지 찾아가 자수한 것일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이 유씨에게 딸의 비보를 알려준 6월 1일 밤 10시 30분 전에, 4명의 남자가 원주경찰서를 찾아왔다. 그들은 바로 이씨와 인희씨가 재직하던 회사의 임직원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유족보다 빨리 경찰서를 찾아왔을까.
이씨가 자수한 시각은 그날 저녁 6시 30분. 경찰은 그로부터 30분 후인 7시경, 유족보다 먼저 이씨의 회사에 자수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 고위직 임직원은 유가족이 도착하기 2시간 전인 저녁 8시 30분경 경찰서를 방문해 이씨와 면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이후 경찰 수사는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경찰 수사가 유미자씨에게 또 다른 '10년 한'으로 남게 된 이유다. 이 사건의 핵심은 직장 상사가 직위를 이용해 벌인 직장내 성희롱 사건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여직원을 납치해 강간하려다 무참히 죽인 살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경찰 수사는 달랐다. 담당 수사 경찰은 이 사건을 '내연 관계에 의한 치정 사건'으로 몰아갔다. 즉, 두 딸을 둔 재혼 유부남(이씨)과 미혼 여성(황인희씨)이 내연 관계로 불륜을 벌이다가 다툼이 일어 살인이 벌어졌다고 수사 방향을 잡은 것이다. 딸을 잃은 것도 원통한데 그 딸의 명예마저도 죽이다니... 유미자씨는 더 이상 딸을 잃은 슬픔으로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 진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내연 관계 치정 살인사건'은 가해자인 이씨의 경찰 진술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씨는 인희씨와의 관계를 묻는 경찰 질문에 '직장 동료 사이'라고 여러 차례 진술했다. 그런데도 담당 경찰은 이를 '내연 관계'라고 둔갑시켰다.
이씨가 자수한 다음날인 2005년 6월 2일, 경찰이 작성한 '피해자에 대한 관계 수사 보고'가 그 증거다. 담당 경찰은 이 문서에서 가해자인 이씨가 '직장 동료 사이'라고 진술했음에도 '피의자는 동료 사이였다고 주장하나, 내연의 관계임을 추궁하여 밝힐 예정임'이라고 보고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내연 관계가 아님을 밝혀낸 이는 결국 어머니 유미자씨였다. 담당 경찰의 '내연 관계 추궁' 운운하는 보고 문서를 근거로 검찰에 진정하는 등 항의하자 검찰은 잘못을 인정했다. 그런데 담당 경찰의 변명은 정말 기가 막혔다. 당시 검찰이 보낸 문서에 의하면, "'내연의 관계'라는 표현은 자신(담당 경찰)이 무식하였기 때문에 잘못 표현한 것"이라며 잘못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변명에 그 어머니는 가슴을 쳤다. 하지만 이 진실이 바로잡힌 때는 이미 1심 재판이 끝난 후였다.
살인범 이씨는 1심에서 15년을 선고 받았다. 끔찍한 살인 유기 사건에 상대적으로 낮은 형량이 내려진 이유가 바로 '내연 관계' 운운 때문이었다. 하지만 2심 판결은 더욱 황당했다. 이씨는 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해 형량을 더 낮췄다. 1심보다 3년이 깎인 12년 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이 형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는 통상의 강간 살인사건 형량이 20년 이상인 점에 비해 매우 낮은 것이었다.
내 딸의 명예회복을 요구한다인희씨의 어머니 유미자씨에게 지난 10년은 끔찍했다. 딸을 잃은 것도 원통한데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국가의 잘못으로 더 큰 고통을 받았다. 특히 인희씨가 살해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강간 미수 범죄에 대해서는 수사조차 하지 않은 것도 억울하다.
특히 이씨가 인사과장으로 근무하던 공기업의 사건 후 처리는 유씨에게 또 하나의 상처가 되었다. 회사는 이씨가 자수한 당일 그를 해고 조치한다. 이씨가 자수한 시각이 6월 1일 저녁 6시 30분. 그리고 30분후인 저녁 7시 경찰에게 연락을 받고 회사 임직원이 경찰서를 방문한 시각은 저녁 8시 30분경. 이미 하루 일과가 끝난 늦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회사는 그 6월 1일에 인사과장 이씨에게 해고 인사 명령을 내린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조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회사는 돌연 3일 후인 6월 3일 이씨에 대한 해고 명령을 취소한다. 그러면서 징계상 해고가 아닌 스스로 사표를 제출하는 '면직 처분'으로 변경해 이씨의 사표를 수리한다. 왜 회사는 이씨에게 이런 특혜를 줬을까? 회사가 작성한 인사 명령에 의하면 사유는 이렇다. 이씨가 재직 과정에서 회사에 공을 많이 세워 그 업적을 감안해 해고를 취소한다는 것이다. 끔찍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유미자씨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상사의 성희롱이 살인 사건으로 비화됐는데도 회사는 여전히 '우리와는 상관없는 개별적 사건'이라는 입장만 고수했다. 거기에 경찰과 검찰의 잘못된 수사와 부실한 재판으로 가해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아 이제 2년 후면 석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