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문학상 수상집을 내다버렸나

신경숙 표절 논란으로 떠올린 문학판의 '사슴'

등록 2015.06.20 17:58수정 2015.06.2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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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물을 먹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 아직 IMF 사태가 나기 전이다. 그때는 대학교 1학년이 도서관에 앉아 전공 공부를 한다는 게 지루해 보이던 시절이다. 취업준비? 스펙쌓기? 그게 다 뭔가. 술과 연애. 그거면 족했다.

그 와중에도 가끔 책상 앞에 앉을 때는 소설책을 읽었다. 이른바 순수소설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어울리던 무리와 대화를 하려면 윤대녕, 윤후명, 최윤 정도는 읽어줘야 했다. 그 중에서도 '○○문학수상집'은 단연 인기였다. 문학잡지를 일일이 찾아 읽을 수 없는 노릇인 데다 문학성을 이미 검증받은 작품들이었기에 안심하고 읽을 수 있었다.

없는 살림에도 그 책만은 해마다 발행되기를 기다렸다 돈을 주고 사서 읽고 책꽂이에 고이 모셔 두었다. 그것은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이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은근히 뽐내는 허세이자 광고랄까? 나도 예술 좀 안다!

그렇게 모은 '○○문학상 수상집' 십수 권을 내다 버린 게 몇 해 전이다. 차마 몇 권은 버리지 못하고 남겨두었지만 대부분 재활용 쓰레기로 내놨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슴같이 구는 꼴이 보기 싫어서다.

사슴을 다시 떠올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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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표절 논란으로 떠올린 문학판의 '사슴' ⓒ freeimages


내가 말하는 사슴은 노천명의 시 '사슴'(1938년 간행)에 등장하는 그런 사슴이다. 나라가 망조가 들었는데도 그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고' 관을 쓴 높은 족속이라, 일상이 아닌 '전설을 생각해 내'는 세상을 외면한 고고한 사슴 말이다.

사슴 본인은 억울하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이 시를 알고 난 뒤로는 세상 물정과는 멀리 떨어져 우두망찰 제 속으로 파고들어 시대 공감이라고는 전연 없는, 그저 곱게 치장한 막무가내 소리를 해대는 소설가와 소설을 사슴 같다고 말한다.


원래 문학상의 취지가 사슴 뽑기 대회인지는 모르겠다. 그게 진정한 순수이고 문학인데 교양이 부족한 내가 뭘 모르는 소리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거다. 책을 내다 버리던 그 해. 나의 허세로는 도저히 그 지독한 사슴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는 거다. 사람들은 지옥으로 달려가는 열차에서 아우성인데 제 그림자에 놀라거나 전설이나 생각해내는 소설을 읽어내기가 버거웠다.

나는 그렇게 순수문학과 연을 끊었다. 그리고 그쪽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고 살았는데 요즘 보아하니 아직도 문학판은 사슴들이 뛰노는 푸른 초원인가 보다. 신경숙 표절 논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응준씨가 제시한 자료를 읽어봤다. 문제가 된 <전설>과 <우국> 전문을 다 읽어보지 못했지만 자료만 읽어봐도 명백한 표절이다. 하지만 표절 여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하자. 문학판에서 이름이 있다는 작가나 평론가가 문제제기를 해도 당사자가 모르쇠를 하면 그만이고 그런 안하무인 행동 뒤에 대형 출판사가 버티고 있는데 나 같은 비전문가가 한 술 거든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다만 그들의 사슴같이 구는 행태는 짚고 가자. 앞서 나는 사슴같이 구는 꼴을 세상을 외면한 순수라고 했다. 그것은 공감대 없는 행동이며 세상 물정 모르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인간의 길로, 사슴은 사슴의 길로

신경숙씨는 모르쇠, 창비는 억지 춘향이다. 모르쇠와 억지춘향은 독자를 무시하는 행위이다. 잘못을 지적 받았으면 이러저러하다고 소명을 해야 할 거 아닌가. 그런데 침묵? 억지춘향? 둘 다 물음을 던진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그 물음의 시작은 이응준이라는 내부고발자였지만 결국 많은 독자들의 물음으로 번져 갔는데도 그 뜻을 무시한 거다.

이거 세상물정 몰라도 너무 모르신다. 작가란 문학판이 있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소설이 비평가 때문에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게 아니다. 독자가 있기에 생명을 이어간다. 고고한 소설가들은 인정 못할지도 모르지만 독자가 책을 사 주니 그 돈이 작가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그 돈으로 작가도 쌀 사고 술 사 먹고 하는 거다. 독자 존중은커녕 독자 무시는 좀 곤란하지 않나?

아마 사슴 같은 분들은 잘 모르실 거다. 휴대폰 한 대 팔아보겠다고 점원들이 얼마나 허리를 굽히는지, 마트 시식 코너에서 만두 한 점 먹여보려고 직원이 애 엄마와 애들에게 얼마나 애를 쓰시는지. 순대국밥 한 그릇을 날라다 주는 청년의 웃음이 왜 그렇게 환한지를. 그 분들에게 고객 무시? 고객의 물음에 침묵?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지난 20세기에 작가에게만은 시류와 다른 고고함이 허락되었다면 그것은 우리를 대신해 권력과 싸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에는 그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럼 최소한 독자들이 뭐라고 하면 귀찮고 하찮아 보여도 물음에 합당한 양과 질의 답은 해줘야 사람의 도리이자 작가의 체면치레 아닌가?

소설은 공감이다. 공감없는 소설이란 도대체 어디다 써 먹어야할지 모르겠다. 내가 문학상 수상집을 내다 버린 건 그 공감없는 소설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신경숙씨와 창비에 세상과 공감하시라는 말씀은 못 올리겠다. 그건 그들에게 놓여진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지 누군가 종용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그들이 무슨 선택을 하든 거기에 합당한 독자들의 공감이 있었으면 한다. 즉, 인간은 인간의 길로 사슴은 사슴의 길로. 요즘 사슴은 거의 멸종되어 보호수로 관리되거나 사육당하는 일부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덧붙이는 글 아날로그캠핑 블러그에도 실렸습니다.
#신경숙표절 #사슴 #순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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