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그릇'은 어떻게 생겼을까?

[청소년을 위한 행복한 인문 이야기 ⑥]

등록 2015.06.22 14:50수정 2015.06.2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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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그릇, 첫 번째 그림

흔히 사람의 인생이나 내면을 '그릇'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의 크기나 내용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의 그릇'이 어떤 모습일까를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

무슨 엉뚱한 소린가 싶을 수도 있지만, 물질과 이기적 욕망에 의해 너무도 쉽게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사회 현실 속에서 좀처럼 자아 정체성을 정립해 나가기 어려운 청소년들이 이 그림을 생각해 보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20대 이전까지의 '인생의 그릇'을 학생들에게 그려보게 하면 대부분이 잘 떠올리지도 못한 채 고개만 갸우뚱거리고, 몇몇 아이들이 빈 그릇을 그리거나 그 안에 사다리 모양으로 여러 개의 빈칸을 가지고 있는 그림을 그립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 공간을 채워가야 하는지를 다시 물으면 그림을 떠올리지 못하던 아이들까지 합세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바로 '공부'라고 말합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공부 잘해야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라고, 선생님으로부터도 공부나 입시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를 들으며 학창시절을 보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학교 공부의 결과가 순간순간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싫어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성장기 '인생의 그릇'은 학제로 구분된 시기에 요구되는 만큼의 공부로 채워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보기 어려운 이유도 이런 '인생의 그릇'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되돌아보면 이미 성인이 된 청년들이나 그보다 좀 더 나이가 많은 어른들도 성장기 '인생의 그릇'의 모양새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이 학생들이 그리고 있는 것이 '정상적'인 그림일까요? 한국 사회는 학력과 입시 결과에 의해 일찌감치 경쟁력이 결정되는 극심한 학벌사회입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속칭 '일류대학' 강박감에 휩싸여 있는 한국의 청소년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쪽을 향한 길 위에 세워집니다. 그리곤 똑같은 방향으로, 똑같은 사람들이 넘쳐나서 도무지 앞도 보이지 않는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갑니다.


우리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사, 학부모들까지 어느새 사회의 전반적이면서 압도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꽉 짜여진 정규 수업, 0교시 공부,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학원, 또 전국 단위의 학력평가, 성취도평가 등을 되풀이하면서 이런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야만 양극화가 극심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아 일류대학을 거쳐 상류층에 진입할 수 있다는 뒤틀린 욕망과 불안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학부모와 학생들은 소중한 삶을 꿈과 희망에 따라서가 아니라 불안에 떠밀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혹독한 상황들은 우리 청소년들이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주체적 자아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갖기가 어려운 현실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고뇌합니다. 겉으로 능력 있어 보이는 아이들도 그 속은 공허하고 황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 공허와 황량함의 틈을 재산, 지위, 권력 등 소위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무한 경쟁의 오기가 파고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공부로 '그릇'의 빈 공간들을 잘 채우면 일류 대학에 진학하고 재벌기업이나 사회지도층으로 진출해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다른 소중한 것들을 채울 방을 갖지 못한 이런 '인생의 그릇' 그림대로 성장한 그들이(물론 무엇이건 절대 예외는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의로운 리더십이나 진정성 있는 공익과 배려의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고 발전시키는 데 앞장설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 현실을 둘러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인생의 그릇' 그림은 결코 '진짜'가 아닙니다.

'인생의 그릇', 두 번째 그림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회학자들은 세계관·인생관이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청소년기 무렵부터의 경험들이 이후 살아가는 동안 사회에 대응하는 심리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인문적 사유의 기본을 다져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그릇'부터 '진짜'를 되찾아야 합니다. 이 일은 청소년들이 의미 있는 삶의 근본이 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가치관의 초석을 제대로 정립하는 일과 직결됩니다. 또한  인생의 진정한 행복, 그리고 우리 사회의 미래의 모습과도 깊은 연관성을 갖습니다.

내가 청소년기를 겪고, 또 교사로 살아오면서 고민해 본 결과 정말 다행히도 인생의 그릇의 본래의 모습, 참모습은 결코 위와 같은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 '인생의 그릇'은 고맙게도 하나의 방으로 된 공간이거나, 사다리 식 빈 칸을 가진 평면적이고 일률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내부가 다양한 크기와 모양과 주제의 방들로 이루어져 있는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의 방들 중에는 정의의 방도 있고, 배려의 방도 있고, 도의의 방도 있으며, 남다른 능력이나 개성의 방도 있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 방과 사랑의 방도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공부(학업)의 방도 그 중의 중요한 방으로 존재합니다. 공부의 방은 다른 방들보다 좀 더 클 수도 있고, 사람에 따라 크기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느 시기에는 다른 방보다 많이 채워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하고 중요한 건 이 공부의 방 역시 우리가 살아가면서 채워야 할 인생의 그릇 안의 여러 소중한 방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이 여러 방들을 골고루 채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로 우리 사회가 구성되어 서로 배려하고 협력하면서 운영되고 발전되어나가야 합니다. 이 두 번째 그림이 반드시 되살려야 하는 우리 '인생의 그릇'의 참모습이고, 결코 잊어서도, 잃어서도 안 되는 바로 우리들의 참모습입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교육의 본질과 방향도 분명하게 보입니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고, 그래서 교육은 '인생의 그릇'의 방들이 골고루 채워지면서 개별적 특성과 개성이 잘 살려져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키워주고 도와주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첫 번째 그림을 강요해도 이제 우리 청소년들은 두 번째 그림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사람다운 삶의 문제에 있어서 현상이 '거짓'이거나 '비정상'일 때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짜'와 '정상'을 지향해 고뇌하고 노력하는 일, 이것이 바로 인문 정신의 핵심입니다.
#인생의 그릇 #인문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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