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마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첫 번째 거부권 행사이자 제헌 국회 이래 역대 73번째 거부권 행사입니다.
청와대는 이를 헌법수호 의무를 지닌 대통령으로서 '원칙'에 따른 것이라 설명합니다. 입법취지를 위배한 정부시행령에 대해 수정·변경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국회법은 위헌인 만큼 박 대통령이 정치적 후폭풍을 감수하고 원칙대로 나선 것이란 얘기입니다.
그 말대로 정치적 후폭풍을 감수한 탓인지 박 대통령은 날이 바짝 서 있었습니다. 지난달 29일 본회의에서 재석의원 244명 중 211명 찬성으로 처리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당장의 정치적 편의",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충분한 검토 없이 서둘러 여야가 합의한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라며 여야 모두를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대해서는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정치를 이용하는 자"로 거침없이 깎아내렸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원칙'에 따른 것이란 설명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국회법 개정안은 정말 1988년 박 대통령의 정치 입문 후 유지해 온 '원칙'과 부합하지 않는 걸까요.
야당 땐 '하극상 시행령' 비판해 놓고 태도 바꿔아니요. 우선, 박 대통령은 입법취지를 위배한 정부시행령에 대해 국회의 시정요구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야당 의원일 때 공동 발의했습니다. 즉, 야당 의원일 땐 현 국회법 개정안과 같은 내용의 법안에 지지한 겁니다.
모두 두 차례입니다. 1988년 12월 갓 정치에 입문한 초선의원일 때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에 서명했습니다. '행정입법이 법률에 위배된다'는 국회의 의견이 제시되면 중앙행정기관장은 이를 수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이 개정안은 현 국회법 개정안과 취지가 사실상 같습니다. 1999년 11월 변정일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에도 동참했습니다. 이 법안은 국회 소관 상임위에 행정입법의 법률 위반 여부를 정기적으로 심사할 수 있는 의무를 부여토록 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국회 상임위에 행정입법 심사권을 줄 수 없다'는 게 현 정부의 입장입니다. 이와 관련, 제정부 법제처장은 이날(25일) 국회법 거부권 행사 관련 브리핑에서 "상임위가 수시로 행정입법을 고치라고 요청하고 정부가 이에 따라야 한다면 정부 정책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없고 정부 정책이 자주 바뀌어 국민들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같은 지적이 나오자, 청와대는 박 대통령은 당시 초선의원이었다고 상기시킵니다. 힘 없는 초선이 선배 의원들의 요구에 응한 것뿐이라는 얘기입니다(관련 기사 :
청와대 "박 대통령, 98년 국회법 개정안 땐 서명만 한 것").
그러나 박 대통령은 야당 당대표 당시에도 입법취지를 위배한 정부시행령은 잘못됐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는 2005년 5월 14일 한나라당 상임중앙위 회의에서 '신문법 시행령'과 관련, "한나라당이 독소조항이라고 반대해 삭제된 내용이 문화관광부 시행령에 버젓이 들어가 있다"라며 "이는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하는 일"이라고 질타했습니다.
2005년 12월 당시 정부시행령으로 사학법 관련 반발을 줄여보고자 한 정부 방침에 대해서는 "모법은 놔두고 시행령만 어떻게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발상"이라며 "이것은 대통령이 시행령을 통해 이 악법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여지까지 주는 결과"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관련 기사 :
박 대통령 청와대 입성 전 '하극상 시행령' 반대는 '사실').
결국, 박 대통령이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정부시행령에 대한 국회의 시정요구권을 바라보는 '잣대'를 달리 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호 유족에게 약속한 진상규명만 생각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