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축제 현장에 설치된 부스를 방문하고 성소수자들을 응원했다.
이희훈
언론은 이번 판결이 '여론에 힘입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2005년까지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은 37%, 반대가 59%에 달했으나, 10년 만에 이 비율은 정확히 반대로 뒤집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여론을 이처럼 급속히 바꿔놓았을까?
흥미롭게도, 40%대 초반에서 정체되어 있던 지지 여론이 급등한 시기는 2009년, 즉 오바마의 집권 시기와 일치한다. 다시 말해, 여론이 급변한 건 6년간이라는 더욱 짧은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동성커플에게 동등한 결혼권을 허락해야 한다는 여론은 40%에서 60%로 뛰며 반대 여론을 압도했다.
이런 변화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오바마의 존재 자체가 가진 상징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비주류에, 최초의 백인이 아닌 대통령인 그는 진보적 가치와 희망을 체화하고 출범했다. 그는 변화의 염원을 전 국민 의료보험, 부자 증세,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 다른 대통령이 엄두도 내지 못할 정책을 끈질기게 추진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온갖 조롱이 쏟아지고 공화당은 방해로 일관했지만, 그는 진보적 정책을 끈질기게 고수했다. 신기하게도, 오바마의 인기와 지지도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도 미국사회는 진보적 가치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변화했다. '느리고 꾸준한 사회 진보의 여정'이라는 연설은 그의 경험을 투영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을 경험했다. 이명박과 박근혜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들에게 온갖 조롱이 쏟아지고, 인기와 지지도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도 한국사회는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 과거로 꾸준히 회귀했다.
물론 대통령 한 명이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바마가 진보적 신념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변화를 몰고 온 것은 국민 자신이었다. 국민이 변화를 원했고,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었기에 무명의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이다. 이번 동성결혼 판결 역시, 1970년 이후 수많은 사람이 시, 주, 국가를 상대로 끝없이 요구하고 싸워온 결과였다.
미국 교회가 앞서서 끌어낸 '변화'이번 미국 판결에서 주목할 것은, 법과 정치 못지않게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다. 법과 정치가 '느리고 꾸준한 노력에 대해 벼락처럼' 보상을 내린 정의의 도구였다면,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왔을까?
잘 알려졌듯, 미국은 기독교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다. 퓨리서치의 2015년 조사를 보면, 70% 이상의 미국인이 자신을 '기독교도'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국가정책과 사회여론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음은 물론이다. 특히 동성결혼처럼 종교적 신념과 결부된 사회 의제일수록 큰 목소리를 내왔다.
기독교는 '모든 이들이 신앞에 평등하다'는 인권정신을 설파하기도 한 반면, 일부는 성차별과 인종주의를 합리화하는 교묘한 논리를 개발해 퍼뜨리기도 했다. 예컨대 구약시대에 여성은 '사람 수를 세는 데 넣지도 않았다'거나, 흑인은 아버지 노아를 수치스럽게 해 저주 받은 '함의 조상'이라는 식으로 사회적 차별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민 60%가 동성결혼을 지지하게 된 데에는 기독교인들의 태도 변화 탓이 크다. 예컨대 주류 개신교의 33%만이 동성결혼에 반대하고, 62%가 찬성하며, 가톨릭 신자의 경우 38%가 반대하고 56%가 찬성한 것이다. 복음주의 개신교는 반대가 70%로 여전히 큰 반감을 갖고 있으나, 이들의 비율은 기독교 전체의 찬성 여론을 압도하기에는 너무 미미하다.
교계의 이런 변화는 오래 전부터 감지되었다. 예컨대 미국 루터회는 2009년에 동성애자가 목사가 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장로교는 2014년에 동성결혼을 인정할 것인지를 놓고 목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표결을 해 '425대 175'라는 압도적 표차로 승인했다. 교회가 연방정부보다 빨리 결혼을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인정한 것이다.
소수 개신교도들이 차별금지법도 막아... 초라한 한국의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