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도공들이 사용하던 일본어 회화책
이윤기
가장 볼 만한 전시장은 박물관과 심수관요의 작품전시관이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도자기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 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조선에서 가져갔던 서책들과 직접 제작한 일본어 회화책 지도 같은 것들 이었습니다.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들이 일본어를 익히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사쯔마 도자기의 기원은 임진, 정유재란(1592-1598)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1598년 사쯔마에서 출병하였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귀국할 때 끌고 온 조선 도공 약 80여 명이 사쯔마에 뿌리를 내리면서 '사쯔마 도자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심수관요가 있는 지역에 가장 많은 도공들이 정착하여 번성하였고, 현재까지 사즈마 도자기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초기 작품으로 유명한 히바까리 다완은 사쯔마의 불을 사용하지만 조선의 흙과 기술을 사용하여 만든 도자기를 말합니다. 심수관요가 있었던 지역은 에도시대까지도 대부분 조선 이름을 사용하고, 조선의 풍속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조선어가 보존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12대 심수관이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 참가와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서 수상하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번경영도기제작소의 공장장에서 민간 도자기 회사의 공장장이 됩니다. 그러나 그가 일하던 도기 회사는 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경영실패로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1874년 심수관은 옥광산도기제작소(훗날 심수관요)를 설립하게 되고, 동경에 지점을 내면서 판매량을 늘이고 기술개발을 통해 도자기 제조 수준을 높여나갔다고 합니다. 마침내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상을 받으면서 명성을 높이게 된 것이지요. 앞서 소개한 것처럼 그때부터 심수관이라는 명인의 이름이 세습되었고, 현재는 15대 심수관이 이곳을 책임지고 있더군요.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타국으로 끌려와 정착하면서 겪었을 고초 그리고 일본에 정착하여 살면서도 조선어와 이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차별과 불이익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힘든 조건 속에서도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를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