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대정읍에서 만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등록 2015.08.03 10:41수정 2015.08.0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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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8일 이번 여름 휴가를 맞아 제주로 여행을 떠났다. 첫째 날,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기념관,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사적 제487호)와 대정향교를 찾았다.

 추사기념관
추사기념관여경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시대 후기 학자이다. 완당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명문가의 출신으로 서예, 문장, 회화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선비였다. 김정희가 살던 당시 정치세력가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일컬으며,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김정희는 청나라의 학문이 높음을 인정하고, 실사구시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우리나라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해석하는 금석학에 관심을 가진다. 김정희는 우리나라의 예전 학문과 역사를 정리한다. 이런 결과로 1817년 김정희는 북한강에 있는 비석이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이를 기록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임을 최초로 밝혀낸다. 당대 유림세력은 주자가 집대성한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같은 경전 공부만 몰두했다. 하지만 김정희는 우리의 것을 찾는 자주적인 학문 자세를 지녔다.

추사는 1810년 청나라를 방문한다. 그는 청나라의 옹방강과 완원과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한다. 김정희가 새로운 학문에 관한 호기심이 충만한 시기를 보낸다. 그는 서자 출신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삼고, 승려인 초의선사를 평생의 벗으로 삼고 교류한다. 또한 중인 계급은 역관 출신들을 제자로 삼는다. 이처럼 추사는 기존의 굴레에 벗어나서 국제적인 식견을 갖춘 자유인의 삶을 살아간다.

1840년 사신단으로 청나라를 방문을 앞둔 어느 날, 그는 형틀에 묶인 채 신문을 받는 처지에 놓인다. 당시 왕의 권력만큼이나 거세진 외척가문을 비판한 상소 때문에 그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한다.

결국, 김정희는 제주에서도 남쪽 끝인 대정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는 대정에서 대략 8년여 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그는 귀향 시절에도 끊임없이 학문에 대한 탐구 자세를 잃지 않는다. 서체에서도 추사체를 만들어낸다. 또한 제주에서도 제자들을 육성한다. 김정희는 음식과 풍토가 맞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보내주는 서적을 읽으면서 고단한 삶을 이겨나갔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여경수

김정희는 역관인 제자 이상적이 보내주는 서적을 귀하게 여겼다. 1844년 그는 자신에게 공경을 다 하는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준다. 이 작품은 예서체로 쓴 <세한도>라는 표제와 소나무와 잣나무,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그림이다. 그림에 <날이 차서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서야 소나무가 늘 푸르다는 사실에 알게 된다>는 글이 적혀있다.


세한도에 나오는 글은 논어에 나오는 글이다. 공자가 세상이 변함에도 절의를 지키는 이들을 표현한 의미이다. 김정희는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공경을 다 하는 그의 제자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자신이 매섭게 추운 겨울 날씨만큼이나 어려움에 부닥쳐 있음을 표현한 내용이기도 하다.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한도
세한도여경수

이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청나라로 가서 추사와 교류한 중국 문인들에게 세한도를 보여준다. 세한도를 보고 감탄한 중국 문인들이 세한도를 보고 느낀 감상문을 적는다. 세한도 그림에는 20명의 학자가 세한도를 보고 느낀 점이 적혀있다. 세한도의 두루마기를 펼치면 마지막에는 독립운동가인 이시영과 오세창과 정인보가 쓴 감상기도 적혀있다.


 대정향교
대정향교여경수

제주 대정에는 읍성이 있을 정도로 제주에서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추사기념관 근처에는 조선 시대에 교육을 담당하는 대정향교가 있다. 대정향교에는 의문당이라는 현판이 있다. 의문당은 김정희와 교류한 중국학자 완원(1764~1849)의 호이다. 1846년 김정희는 의문당 현판 글씨를 썼다.

이를 통해서 살펴보면, 당시 대정에 있던 유림과 김정희가 교류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원래 김정희는 집주변에 가시덤불을 쳐서 집 안에서만 머무르는 '위리안치' 형벌을 받았지만, 대정 현감의 묵인으로 집 주변이나 멀지 않은 거리만큼은 오가는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정향교
대정향교여경수

추사기념관과 대정향교까지 추사 유배 길이 정돈되어있다. 추사를 생각하면서 이 길을 걷다 보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추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경수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hunlaw.tistory.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대정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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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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