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기념관
여경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시대 후기 학자이다. 완당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명문가의 출신으로 서예, 문장, 회화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선비였다. 김정희가 살던 당시 정치세력가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일컬으며,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김정희는 청나라의 학문이 높음을 인정하고, 실사구시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우리나라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해석하는 금석학에 관심을 가진다. 김정희는 우리나라의 예전 학문과 역사를 정리한다. 이런 결과로 1817년 김정희는 북한강에 있는 비석이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이를 기록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임을 최초로 밝혀낸다. 당대 유림세력은 주자가 집대성한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같은 경전 공부만 몰두했다. 하지만 김정희는 우리의 것을 찾는 자주적인 학문 자세를 지녔다.
추사는 1810년 청나라를 방문한다. 그는 청나라의 옹방강과 완원과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한다. 김정희가 새로운 학문에 관한 호기심이 충만한 시기를 보낸다. 그는 서자 출신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삼고, 승려인 초의선사를 평생의 벗으로 삼고 교류한다. 또한 중인 계급은 역관 출신들을 제자로 삼는다. 이처럼 추사는 기존의 굴레에 벗어나서 국제적인 식견을 갖춘 자유인의 삶을 살아간다.
1840년 사신단으로 청나라를 방문을 앞둔 어느 날, 그는 형틀에 묶인 채 신문을 받는 처지에 놓인다. 당시 왕의 권력만큼이나 거세진 외척가문을 비판한 상소 때문에 그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한다.
결국, 김정희는 제주에서도 남쪽 끝인 대정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는 대정에서 대략 8년여 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그는 귀향 시절에도 끊임없이 학문에 대한 탐구 자세를 잃지 않는다. 서체에서도 추사체를 만들어낸다. 또한 제주에서도 제자들을 육성한다. 김정희는 음식과 풍토가 맞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보내주는 서적을 읽으면서 고단한 삶을 이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