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한 이순신, 여기서 웃었다

정유재란 때 조선수군에 큰 힘 준 '조양창' 있었던 보성 고내마을

등록 2015.08.11 10:25수정 2015.08.1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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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세곡 보관 창고가 있었던 조양창 터.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군량미를 손에 넣었던 곳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 뒷산에 있다. ⓒ 이돈삼


1597년 8월 9일, 양력으로 9월 19일이었다. 순천부 낙안을 떠난 이순신은 보성으로 향했다. 보성으로 가는 이순신의 마음은 여느 곳과 달랐다. 1530년경 장인 방진이 군수를 지냈던 고장이어서다.

1545년 서울 마르내골(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21살 때인 1565년(명종 20년)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외동딸인 상주 방씨와 혼인을 했다. 방씨의 나이는 19살이었다. 당시 방진은 조선에서 활을 잘 쏘기로 이름난 관리였다.


이순신은 장인의 전폭적인 격려와 경제적인 후원을 받았다.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처가에서 지내며 무예를 연마했다. 장인과 장모가 세상을 떠나자 후손이 없는 처가(충남 아산)가 이순신의 본가가 됐다.

당시 이순신이 보성에서 처음 들른 곳은 벌교였다. 벌교는 득량만으로 가는 길목이다. 조양창으로 가는 중간지점이고, 보성현청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이순신은 장양리 진석마을의 선소를 점검했다. 진석마을은 부싯돌로 쓰던 참돌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무기고와 식량창고도 차례로 수색을 했다. 보성지역 관원들의 소집을 알리는 전령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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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벌교역 전경. 벌교는 득량만으로 가는 길목이다. 정유재란 당시 조양창으로 가는 중간지점이고, 보성현청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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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양성과 조양창이 있었던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 전경. 마을 자리가 당시 조양성의 터였다. 조양창은 마을의 뒷산에 있었다. ⓒ 이돈삼


지금은 벌교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설이 벌교 포구를 배경으로 쓰여졌다. 여기에 소설의 중심무대였던 현부자네집이 있고 철다리와 소화다리, 횡갯다리가 있다. 김범우의집, 중도방죽, 남도여관, 소화의집, 회정리교회, 금융조합도 있다. 태백산맥 문학공원도 조성돼 있다.

벌교를 가로지른 이순신은 득량만의 연안포구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의 방주리를 거쳐 조성면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길은 보성컨트리클럽 입구의 대곡저수지와 주월산 패러글라이딩장으로 들어가는 평촌마을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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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고내마을 회관 전경. 고내마을은 옛 조양성이 있었던 자리다. 지금은 자연부락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 현재 48가구 80여 명이 살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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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마을에서 많이 재배하고 있는 참다래 농원 풍경. 참다래는 보성군 조성면 일대에서 많이 재배하고 있다. 보성 특산물이다. ⓒ 이돈삼


이순신이 연안을 따라 도착한 곳은 고내(庫內)마을이다. 당시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던 곳이다. 조성면 우천리에 속한다. 지금은 자연부락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 현재 48가구 80여 명이 살고 있다. 보성의 특산물인 참다래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당시에는 조양현의 소재지였다. 조양현은 757년 설치된 이후 고려를 거쳐 1441년(세종 23년)까지 700여 년 동안 유지됐다. 여기에는 당시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 외성은 석축 2255척, 높이 7척에 우물 2곳과 군량창고가 있었다. 현을 다스리는 관아도 있었다. 이 일대 군사와 행정의 요충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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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마을 입구에 들어서 있는 마을정자 고내정 풍경. 고내마을 사람들의 쉼터다. 고내정 앞에 마을 유래비가 서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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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창 터에 널브러진 크고 작은 바위들. 정유재란 당시 있던 조양성에 들어간 바위들로 추정되고 있다. ⓒ 이돈삼


현재 마을이 들어서 있는 자리에 동헌이 있었다. 마을회관 뒤로 당시 성의 석축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성 터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돌도 여기저기 보인다. 군량창고인 조양창은 이 마을의 뒷산에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창등'이라 부른다. 송림 사이로 넓게 드러난 빈 터가 당시 조양창이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주변에는 큰 돌덩이가 널브러져 있다. 옛 성곽과 창고에서 나온 돌임을 직감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우리들 놀이터였어라. 공도 여기서 찼고. 창칼의 부스러기 같은 것도 많이 나왔고라.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는디. 지금 생각항께 귀한 유물이었던 것 같은디."

지난 7월 22일 만난 임철모(61) 고내마을 이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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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고내마을을 이끌고 있는 임철모 이장. 더위를 피해 고내정에 앉아서 옛 고내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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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마을의 폐가 풍경. 마당에 잡초 무성한 폐가 자리가 옛 관리들이 유흥을 즐긴 자리라고 전해진다. ⓒ 이돈삼


임 이장과 마을주민들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본 마을에는 돌담이 즐비하다. 골목마다 돌담으로 이어진다. 언뜻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주민들은 이 돌담이 "성의 돌을 깨서 쌓은 것"이라고 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하면서 골목길을 넓히고 담장을 개량하면서 쌓은 것이란다. 마을 인근의 방조제나 저수지도 그렇게 쌓았다고 했다.

마을에 샘터도 있다. 당시 동헌과 객사 터는 모두 빈집으로 남아 있다. 폐가가 되다시피 했다. 잡초 무성한 곳은 관리들이 유흥을 즐긴 자리라고 했다. 마을에 고목이 많았는데, 모두 폐사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다. 조양창이 있었던 뒷산에 시누대도 많았다. 당시 화살을 만드는 데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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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마을 골목 풍경. 골목마다 돌담이 즐비하다. 옛 조양성의 돌을 깨서 쌓은 것이라는 게 마을사람들의 얘기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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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마을의 옛 샘터. 정유재란 당시 조양성의 우물 터로 알려지고 있다. 돌담이 즐비한 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이순신이 도착한 조양창에는 정적만 감돌았다. 창고를 지키는 병사도 보이지 않았다. 창고는 온전했다. 청야책에 따라 불태워졌던 지금까지의 창고와는 달랐다. 이순신은 부푼 기대를 안고 병사로 하여금 창고의 문을 열어보도록 했다.

창고의 문을 연 병사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곡식이 그대로 있습니다 장군. 봉인도 뜯지 않았사옵니다."

이순신은 봉인된 군량미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가마니가 새끼줄에 그대로 묶여져 있었다. 병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전쟁에서 기본이 되는 군량미를 확보한 순간이었다. 긴장하고 지켜보던 병사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이순신은 군사로 하여금 군량창고를 잘 지키도록 했다.

군량미를 손에 넣자 이순신의 뇌리에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의금부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풀려나 천리가 넘는 길을 백의종군하고, 바로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수군 재건을 위해 뛰어왔다. 구례에서 곡성으로, 옥과로, 석곡으로, 그리고 순천과 낙안을 거쳐 고내까지 벅찬 강행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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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양창이 있었던 자리.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도착했을 때 새끼줄에 그대로 묶인 세곡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전쟁에서 기본이 되는 군량미를 확보한 곳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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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고내마을 풍경. 지금은 자연부락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 군량미를 제공,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내마을 #조양창 #조양성 #임철모 #조선수군재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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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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