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하지만 씁쓸한 영화 <암살>

영화 <암살>을 보고

등록 2015.08.17 16:52수정 2015.08.18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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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암살>이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광복 70주년에다가 흥미 만점이라는 입소문 때문인지, 개봉한 지 꽤 오래 되었음에도 상영관이 꽉 차 있다. 이런 상태라면 천오백만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영 시간이 2시간 반 가까이 되는 데도 별로 지루한 느낌은 받지 못했다.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와 같은 배우들이 동시 출연했다. 연기의 몰입도도 높았다. 30년대 시대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세트 구성이나 박진감 있는 액션, 사실주의를 배경으로 한 탄탄한 줄거리 구성 등. 이런 요소를 보면 한국 영화의 높아진 수준을 대변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통쾌하고 후련한 재미가 적지 않지만, 씁쓸한 기분도 든다.

이야기 하나. 먼저 오늘날 문화산업과 관련된 영화 이야기부터 해보자. 무엇보다 이 영화는 근대사를 반영하는 시대극이다. 올해는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70주년이고 남북 전쟁이 발발한 지 65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걸 염두에 두어서인지 연일 방송에서도 식민지와 전쟁의 참화를 겪고 지난 70년 동안 우리가 성장한 뒷이야기가 넘치고 있다.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영화 제작자들도 이런 예민한 시대 상황을 놓치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명랑>이나 드라마 <징비록>, 80년대의 인권 상황과 온몸으로 싸워나간 변호사 이야기를 그린 <변호인>, 가족사를 배경으로 남북 전쟁 이후의 고단한 성장사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은 이런 대표적 흥행가도를 탔다.

일련의 이런 영화들이 전 국민의 30%나 되는 천 5백만 이상이 관람했다는 것은 아무리 문화적 현상이라 해도 기형적일 정도로 쏠린 것이다. 영화 <암살>도 이런 시대극의 흥행가도에 올라탈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이런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 영화가 다른 모든 문화적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이 두렵다는 느낌도 든다.

한 달에 책 1권도 보지 않고, 연극이나 다른 공연들은 거의 관람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상황에서 관심이 오직 영화로만 몰리는 것은 극심한 문화적 편식 현상을 반영한다. 편식이 심할수록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이런 흥행 영화의 이면에는 거대한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영화는 단순한 오락거리보다 중요한 수단

이야기 둘. 영화는 신임 조선 총독을 접견하는 조선 제1의 부자 강인국의 발언으로 시작한다. 권력 앞에서 한없이 비굴한 태도로 강인국은 말한다. '가난한 조선을 일본이 산업화시켰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 덕택에 조선이 근대화의 대열에 올라 섰다는 이야기리라. 많이 들어본 식민지 근대화 이론의 핵심이다. 그는 나중에 안옥윤이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눌 때도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다 가족을 위한 것이고, 민족을 위한 것이다"라고. 일련의 말들에 일맥상통하는 논리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가족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 이론의 밑바탕에 놓인 가부장적 가장의 목소리가 그렇다.

영화는 이런 모순의 연결고리로서 친일파 강인국과 식민지 군대의 장군인 가와구찌를 혼맥으로 연결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에서는 근친 살해와 살부(殺父)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아버지는 친일파이고 식민지 모국의 대리인이고 가족주의를 유지하는 부권의 상징이다.

청부업자 상하이 피스톨(하정우 분)은 본래 친일파 아버지들을 살해하기 위한 자식들이 결성한 '살부계'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계획이 실패하자 죽거나 전문 청부업자로 변신한 것이다. 강인국은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내를 죽이고, 나중에는 오인한 상태로 딸 미츠코도 죽인다. 그의 행각은 부권으로 유지되는 가족이 해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아버지를 처단하기 위해 총을 겨눈 안옥윤은 끝내 강인국을 죽이지 못하는데, 하와이 피스톨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야기 셋. 이런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정서적으로 감동하면서 상당히 공감한다. 이런 현상은 억지로 강요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 공연을 보면서 아테네인들이 느끼는 감정의 카타르시스(catarsis) 효과가 비극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했다는 진실을 안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고 스스로 유배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안티고네의 호소를 무시했다가 아들과 아내를 잃는 크레온에 대해 함께 분노하고 무지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이런 정서적 유대를 통해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와의 일체감을 확인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회의식과 민주주의를 훈련하는 장을 마련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극의 효과가 오늘날의 영화에서 똑같이 주어지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오늘날 시대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런 영화들은 공감은 불러일으키지만, 그 이상으로 대리 배설과 면죄 의식을 심어주는 경우로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현상은 현실과 역사를 소모품처럼 허비할 뿐 이성적인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잘못되면 영화의 정서적 공감이 편협한 집단감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국제시장>이나 <연평해전>에서 보듯 지나친 가족주의나 애국심에 쏠리는 현상이 그렇다.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문화 산업 중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영향을 생각한다면 영화는 단순한 감정의 소모품이나 오락거리 이상으로 선전과 교육의 중요한 수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 우리는 망각했다

이야기 넷. <암살>의 마지막 5분은 해방 후의 상황을 보여준다. 하지만 에필로그 같은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나는 통쾌함보다는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씁쓸함과 깊은 비애감마저 들었다. 그게 무얼까? 그것은 감독의 연출이고 메시지일 수도 있다. 감독은 염석진 같은 변절자가 역사의 이름으로 처단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일부러 넣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천황의 항복 선언을 듣고 나서 김원봉은 홀로 죽은 투사들을 기리는 술잔을 비운다. 그는 수많은 투사의 이름이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고백한다.

그런 두려움이 무색하게 김원봉은 해방정국에서 오히려 친일 경찰의 고문을 받고 월북한다. 해방 후 경찰 간부 행세를 하던 염석진은 49년 반민특위 법정에서 변절 행각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벗은 몸 곳곳에 독립투쟁의 상처와 흔적을 보여주면서 혐의를 부인하고, 법정은 결국 증거부족을 이유로 그를 풀어준다. 그는 법정을 나와 시장을 거닐다가 안옥윤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따라가다가 함정에 빠진다. 이곳에서 그는 동지를 배반하고 팔아먹은 대가로 안옥윤의 총에 의해 암살당한다.

변절자가 처단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일종의 통쾌한 감정을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5분을 보면서 앞서 말한 알 수 없는 슬픔과 비애의 정체를 확인한다. 김원봉의 말처럼 우리는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던 전사들과 투사들, 그리고 지사들을 거의 완벽하게 망각했다.

영화 <암살>을 보고 느낀 슬픔의 이유

반민특위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인재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이승만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덕분에 친일분자들은 신분을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었고, 해방된 조국에서 여전히 부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 근대사의 비극의 씨앗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감독은 그런 역사적 현실에 분개한 탓인지 한 걸음 나아가 반민특위가 작동하지만 증거부족으로 방면되는 상황까지 연출하고 있다. 법이 풀어준 셈이다. 그러고 나서 엄옥윤의 사적 복수의 장면을 통해 관객들의 억눌린 분노를 풀어주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사를 역사의식과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청산하지 못하고 사적인 복수에 의존하게 한다는 것. 이것 역시 한국 근대사의 또 다른 비극을 말해줄 뿐이다. 법이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정의를 실현하는 최종 수단이 될 수 없었던 한국 근대사. 그 무기력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근대화된 문명국가에서 사적 복수는 통쾌한 감정의 배설창구 이상으로 문제와 갈등의 합리적 해결을 봉쇄할 뿐이다. 부정의하고 무능한 국가로 인해 다시금 개인이 역사의 전면으로 떠밀리는 형상이다. 아무튼 그 이후 남북의 동족 간에 참혹한 전쟁과 군부 독재로 점철된 한국 근대사의 참혹한 역사는 해방 공간의 정상적인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내가 영화 <암살>을 보고 느낀 슬픔과 비애는 아마도 그런 것들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종철은 철학박사이며 연세대 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입니다.
#암살 #김원봉 #전지현 #문화산업 #반민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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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사회 비판, 예술 등에 관심있습니다. 전 몽골 Huree ICT University 한국어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연세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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