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 영화<베테랑>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재벌 2세 조태오를 중심으로 재벌이 어떤 조직인지 보여준다. 첫째, 재벌은 회장의 검찰 조사가 보여주듯이 불법이 만성화된 조직이며, 검찰간부 출신의 법률고문단과 법무팀을 통해 온갖 불법을 합법으로 위장한다. 둘째, 가족이 소유권을 나눠 먹는 족벌체제와 혈연적 위계질서로 권력이 재편되어 있다. 셋째, 조태오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일반직원들의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하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임원들이 기저귀를 차고 들어갈 정도로 권위적인 조직문화가 팽배하다. 넷째, 회장은 집무실에서 임원에게 골프채로 '빳따'를 치고, 조태오는 걸핏하면 집기를 때려 부수는 등 폭력이 만연하다.
영화는 조태오가 본사 앞에서 하청업체로부터 떼인 임금 420만 원을 지불하라며 1인 시위를 벌이던 배기사를 자기 사무실로 끌고 가 어떤 모욕을 퍼부으며 돈의 힘을 과시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직접적으로 어떤 사건을 지시한다. 2010년 7월 SK그룹 창업주의 조카 최철원은 인수합병 과정에서 화물연대 소속이란 이유로 계약해지 당한 탱크로리 노동자 유홍준씨가 SK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자, 자기 집무실로 불러 주먹과 야구방망이로 구타하고 2000만 원을 집어주었다. 이른바 '맷값 폭행'사건으로, 당시 보도는 최철원이 평소에도 자기 직원들에게 삽자루와 골프채로 폭행하고, 사냥개로 여직원을 위협했다고 전했다.
영화는 다시 항의하러 간 배기사를 조태오가 직접 폭행해 사고가 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설마 재벌 2세가 직접 노동자를 폭행했을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2007년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환기시킨다. 한화의 김승연 회장은 아들이 유흥업소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상처를 입은 데 격분해, 자신이 직접 경호원과 조폭을 데리고 가 술집 종업원들을 산으로 끌고 다니며 폭행했다. 당시 김승연 회장은 권투 펀치를 흉내 내가며 폭행을 재연해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실제 사건들은 재벌의 조직문화가 조직폭력배의 문화와 별 차이가 없음을 알려준다. 영화는 이러한 사건들을 버무려, 패륜적인 폭력을 가하는 재벌들의 비틀린 행태를 고발한다.
영화는 조태오가 직원들을 돈으로 입막음하고, 인맥을 동원해 경찰·검찰에 외압을 행사하고, 광고로 언론을 통제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맥과 돈과 자리로 얽혀 있는 세계에서 재벌은 사회를 손에 넣고 주무르며, 자신들의 경호 인력을 통해 공권력의 행사를 막는다. 영화 속 경찰을 막아서는 경호 인력들의 모습은 흡사 사극에 등장하는 사병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영화는 완전히 묻힐 뻔한 진실이 서도철의 끈질긴 탐문과 조태오의 무리수로 인해 마침내 세상에 낱낱이 까발려지는 모습을 통쾌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현실 영화는 조태오가 기소되는 것에서 끝나지만, 현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철원은 2010년 10월에 구속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지만, 2011년 4월 항소심 첫 공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피해자와 합의했고 사회적 지탄을 받은 점 등을 고려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에 앞서 2011년 3월 검찰은 피해자인 유씨가 SK본사 앞에 화물차를 주차하고 1인 시위를 한 것이 업무방해 및 일반교통방해에 해당한다며 기소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박철 부장검사는 9월에 검찰을 나와, 4달 후 SK건설의 전무급인 '윤리경영총괄' 자리에 임용된다. 피해자 유씨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뒷이야기는 영화가 미처 전달하지 못한 현실의 잔혹함에 주목하게 한다. 영화가 아무리 막장이어도 현실은 더 막장이고, 영화가 보여주는 사필귀정의 쾌감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동안 수많은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재벌이 재현되어 왔다. <하녀>, <돈의 맛>, <추적자>, <황금의 제국>, <시크릿 가든>, <풍문으로 들었소>, <가면>, <상류사회> 등등. 자신을 대통령도 만들 수 있는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회장님부터, 고상한 귀족 코스프레에 빠진 허당 사모님, 거만하지만 달달한 로맨티스트 왕자님까지. 관객들은 이들을 보면서 때로는 위압감을 느끼며 환호하고, 때로는 선망하거나 냉소하고, 또 때로는 사랑에 빠진다. <베테랑>은 여기에 실제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파락호 약쟁이'를 추가하여 즉각적인 공분과 카타르시스를 끌어낸다. <베테랑>은 대한민국의 재벌은 많은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 같은 최소한의 체면이나 위선도 갖추지 못한 천박한 존재들임을 적절하게 폭로한다. 그러나 그들이 천박한지 우아한지는 재벌의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가령 재벌 2세가 조태오 같은 파락호인 것은 문제이고,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 같은 왕자님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재벌의 캐릭터보다 더 중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