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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잊는 것과 포기하는 것이 그만큼 쌓여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럼에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왼 손에 쥐고 있는 휴대전화를 한참 찾는다거나, 약을 먹고 나서 그것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를 두고 헛갈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처음 그런 경험을 갖게 되었을 때 황당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문 열쇠도 없이 4차선 도로를 달려 간 산골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속상했던 기억들, 특히 서울서 내려 온 아들과 함께 두 번씩이나 열쇠 없이 문 앞에서 호주머니를 뒤졌을 때는 그 밖의 다른 실수들이 생각나면서 이러다가 노망나는 것인가, 하는 마음이 걱정으로 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서서히 포기로 이어졌고 이제는 일정 부분 내 것인 양 익숙해졌다. 그런 것들 가운데 내 안의 미묘한 감정, 예컨대 그리움이나 설렘 혹은 기다림 같은 것들의 포기도 포함되어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어떻게 내 안에 그처럼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며칠 전 항구도시를 찾을 일이 있었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바다를 보기 위해 부두를 거닐었다. 해거름의 긴 여운이 바다를 적시고, 갈매기 몇 마리도 그 위에서 끼룩이고 있었다. 누군가, 패티 김의 <이별>을 긴 리듬의 색소폰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석양의 빛나는 항구와 바람, 그 하늘을 떠도는 구성진 가락. 아마 그 정경은 내 감성을 극도로 센티멘털하게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때 그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몇 년 만임에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어제 본 것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가왔다. 뜻밖의 조우에 잠깐 당황했다. 그 사람의 등 뒤로 석양에 물든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악수를 했다.
아, 그 따뜻한 사람의 감촉. 그 한 번의 악수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시인으로서 한용운도 이런 감각적 일탈을 통해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을 말하지 않았을까.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은 오래 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사람은 몇 마디 안부를 묻고는 다시 바다가 부서지는 언덕을 넘어 사라졌다.
바다를 보며 앉아 있는 내내 몇 년 전의 내 삶이 살아나 똬리를 튼 구렁이처럼 파고들었다. 그동안의 망각과 상실 그리고 포기는 감쪽같이 없어지고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사무쳤다. 그 시절 곁에 머물던 사람들의 모습이 허공을 맴돌고 그때 품고 있었던 이상과 꿈, 그리고 그리움까지도 향기처럼 코끝을 자극했다. 아, 그 사람과 먹었던 밥과 술이라니…, 그리고 바람 부는 시가지를 배회하던 날들이라니.
사람 사는 세상에서 더러 가슴을 떨게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부대낌도 있었고 어지러운 절망도 있었다. 희망과 평화도 있었고 패배도 있었다. 그것이 뭉뚱그려 내 삶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중심을 관통함으로써 잊는 것과 포기하는 것의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 시절을 부정하랴, 어찌 그 시절을 잊을 수 있으랴, 어찌 삶을 반추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 사람. 한 때 추억을 공유한 사람.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쪽에 따뜻한 감성을 심어 준 사람. 그리하여 내게 하늘의 달을 다시 쳐다보게 해준 사람들.
그 사람이 내 안의 회오리를 알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내가 가진 애틋한 마음을, 추억을, 그리움을 알지 못해도 하등 상관없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일이니 내 몫이다.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 이렇게 세월이 단박에 일어서다니. 늙어가는 것이 포기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아직 내 가슴 안에도 절절한 추억이 끓고 있음을 알게 해 준 그 사람에게 축복이 밤바다처럼 출렁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먼 바다의 야경을 바라보다 일어섰다. 생각해보니 언제나 일어서는 것은 내게 중요한 삶의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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