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 명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서평]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 영국편

등록 2015.09.22 11:16수정 2015.09.2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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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감명깊게 본 드라마 <어셈블리>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지옥같은 세상을 신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구원하기 위해 만든게 정치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정치' 대신 '복지'라는 말이 이 명제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삶을 구원할 목적으로 태어났으나, 그 수단으로는 인간성을 상실한 '악마적 방법'마저도 기꺼이 동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는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복지'는 억압과 차별,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배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거의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물론 '어떤 복지냐'라는 물음까지 파고들면 '자유주의적 복지국가' '보수주의적 복지국가'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등 복지국가의 성격과 유형에 대한 까다롭고 많은 논쟁이 따라붙는다. 현대 복지국가 시스템은 사회복지 제도와 정책들을 연구하고, 설계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여러 철학적 문제들을 논쟁하고 합의점을 도출하면서 만들어져 왔다.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은 복지국가 발달 역사를 '인물'로 조명한 책이다. 복지국가 초창기에 사상적, 제도적, 정책적 기초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며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세계의 복지국가들을 다루는 시리즈의 첫 번째 기획으로 영국의 복지 실천가들을 다루고 있다. 저자인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은 "종국에는 한국의 복지 사상 형성과 발전에 큰 힘을 쏟은 인물들을 조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처칠이 거부하고 한국에서 외면당한 '베버리지 보고서'

'대처리즘'이 영국을 장악하면서 상당히 후퇴했지만, 초창기 영국의 복지체제는 유럽에서도 가장 '보편주의' 원칙에 충실한 사회주의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을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원조'로 만든 역사적인 문건이 바로 '베버리지 보고서'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다보면 '별 다섯개'를 쳐도 모자랄만큼 중요하게 언급되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1,2차 세계대전의 포화속에서 탄생했다. 전쟁은 영국을 폐허와 궁핍으로 내몰았고, 전쟁 이후의 새로운 사회와 삶에 대한 동경이 커졌다. 윈스턴 처칠 정부는 전후 사회 비전을 마련하기 위해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에 관한 부처간 위원회'를 만들고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Henry Beveridge, 1879~1963)에게 위원장을 맡겼다.

각 부처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1942년 12월 1일,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라는 이름의 최종 보고서가 발표됐다. 그러나 보고서의 현실화에 회의적이었던 처칠은 이를 거부했고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 베버리지 개인이 작성한 것으로 출간됐다.


보고서는 빈곤에서의 해방, 자산조사 없는 보편적 복지급여, 전쟁의 고통속에서 벗어나 새롭고 더 평등한 영국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었다. 베버리지는 '사회보장'이 '5대 거악'(무지, 불결, 질병, 나태, 궁핍)을 퇴치하기 위한 공격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가족수당(아동수당), 포괄적 보건의료 서비스 도입, 완전고용유지의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봤다.

특히 보편주의 원칙에 기반해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내셔널미니멈'(National Minimum, 국민최저기준)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소득을 평생 보장하고자 했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최저생활수준 보장을 사회적 권리로 규정하고 생존권을 처음으로 사회보장에 포함하여 엘리자베스 시대의 '빈민법'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88쪽) 빈곤층과 산업 노동자를 뛰어넘어 광범위한 계층의 인구를 복지 수급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정액 급여 제도'를 통해 급여 수준의 차이를 없애 '보편주의' 원칙을 구현하고자 했다.

처칠 행정부는 거부했지만 영국인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출간된 보고서를 사기 위해 1마일이 넘게 줄을 서고 그 당시에 63만5천부의 판매고를 기록했다고 하니 보고서의 엄청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영국인들은 '베버리지 보고서'에 보편적 복지의 상징 어구인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현을 붙였다.

1948년 한국의 제헌헌법을 만든 유진오의 책상 위에 <베버리지 보고서>가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유명세에 비해 한국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는 사람도 매우 드물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외면받은 것처럼 한국에서 복지국가는 '남의 집 떡' 취급을 받았다. 경제성장이 언제나 최고의 가치였다. (91쪽)

'보편주의냐 선별주의냐'의 논쟁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복지 담론의 정체와 광범위한 복지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한국에서 '베버리지의 원칙'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현대 복지국가의 '이정표'로 평가되는 '베버리지 보고서' 전문이 아직도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어쩌면 1948년 제헌헌법을 만들 당시 '베버리지 보고서'가 외면당했던 때부터 한국 복지사의 험난한 여정은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사실이 여전히 복지국가 '걸음마' 단계에 있는 한국 사회복지의 현 주소를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마셜의 '사회권'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

베버리지와 함께 복지국가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을 꼽으라면 이 사람을 빼 놓을 수 없다. 토마스 험프리 마셜.(Thomas Humprey Marshall, 1893~1981) 영국의 사회학자인 마셜은 '시민권 이론'을 통해 복지국가의 이론적 지평을 확장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저자는 "마셜의 시민권 이론에 기초한 '사회권'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복지는 여전히 자선이나 시혜적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며 "사회권 개념이 제기됨으로써 우리는 복지가 보편적 권리임을 자각할 수 있고 복지국가는 사회권을 보장해주는 국가란 인식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고(229쪽) 설명했다. 

시민권은 18세기에는 사유재산권 등 법적 지위와 관련된 시민적 권리(공민권), 19세기에는 보통선거권 등 정치적 권리(정치권)가, 20세기에는 사회적 권리(사회권)가 대두되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발전해왔다. 마셜에 따르면 20세기 들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은 '전쟁 중'이다. 민주주의가 1인1표에 따른 평등을 지지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부의 불평등에 따른 영향력의 불평등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권'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이 타협한 산물로 인식했고, 복지국가는 사회권이 보장되는 국가라고 생각했다.

마셜은 경제안정과 복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공민권과 정치권도 위태로울 수 밖에 없다고 봤다. 공민권과 정치권의 효과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사회권'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공민권과 정치권은 사회권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고 또 사회권에 의해 지지되어야 '시민권의 삼각대'가 균형을 잃지 않는다고(236쪽) 했다.

마셜은 베버리지의 '내셔널미니멈' 개념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최저한의 복지수준은 수혜자에게 낙인효과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국가가 주는 복지급여는 최저한의 삶을 보장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적정한 급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셜에게 복지국가는 사회적 권리의 집합이며 보편적 시민권으로서 사회권의 제도화를 의미했다. 그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사회적 정책 목표로 빈곤 해소, 복지 극대화, 평등 추구를 제시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빈곤과 불평등이 확대되면서 복지국가의 기본 원칙인 사회권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욱 밝아졌다. 사회권의 보편적 가치는 국제사회에서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일찍이 1948년 제정된 '세계인권선언'도 인간의 권리를 공민권과 정치권으로만 제한하지 안고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 등 일반적으로 인정된 인간의 모든 권리를 옹호했다. 그 후 1966년에 국제연합(UN)은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실효성있게 만들기 위해 법적 구속력을 갖춘 '국제인권규약'을 작성하였다. (251쪽)

대한민국 헌법 34조는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복지 지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낸 '부문별 사회복지지출 수준 국제비교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노인, 장애인, 유족, 가족, 적극적 노동시장(직업훈련수당 등), 실업, 보건 등 모든 부문에서 복지지출이 미흡하다. 복지 지출의 미흡과 불평등의 증가는 한국의 '사회권'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베버리지와 마셜 이외에도 책에는 영국 복지국가의 이념적 기원을 연 시드니와 비어트리스 웹 부부, 최초의 사회조사를 통해 빈곤관의 전복을 가져온 찰스 부스와 시봄 라운트리, 노령연금을 창안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주거복지를 선도했던 옥타비아 힐, 영국 사회정책학의 대부 리처드 티트머스 등 복지국가 발달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생애를 보면 복지국가의 길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지국가는 사회적 편견과 저항에 맞서 싸우면서 점점 그 지평을 넓혀왔다. 한국이 복지국가로 가는 길도 험난할 것이다. 그 길의 맨 앞장이든 후미진 골목의 어디쯤이든간에 복지 사회를 위해 삶을 헌신하는 수많은 실천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덧붙이는 글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이창곤 지음 / 인간과복지 펴냄 / 2014. 10.)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 영국편

이창곤 지음,
인간과복지, 2014


#복지국가 #베버리지 보고서 #보편주의 #선별주의 #사회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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