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사고 12일째였던 지난해 4월 27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노란리본이 줄지어 있는 모습.
이희훈
세월호가 침몰한 바다의 수심은 약 46m에 이른다. 그 바다에 들어가면 코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옆으로 쓰러져 있는 세월호 내부는 더 캄캄하다. 세월호는 격실이 많은 배다. 깊은 바다로 잠수한 뒤, 세월호로 들어가 비좁은 격실을 뒤져 희생된 사람들을 찾는 일. 아무나 할 수 없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일이다.
"보통 일이 아니죠. 그렇다고 세월호 내부가 깨끗하게 치워져 있나요? 온갖 부유물이 배 안에 가득합니다. 아이들 유품이라도 찾으려는 부모님 마음을 아니까, 그 많은 부유물도 저희가 다 꺼내왔습니다. 너무 캄캄해서 손으로 격실 내부를 더듬으며 애기들을 찾았어요. 그러다 내 손에 애기들 육신이 닿으면…."사람을 찾으면 바다 위의 공우영 잠수사에게 통신을 보낸다. 베테랑 공우영 잠수사는 물 속 후배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도록 조언하고 격려한다. 선배는 통신 장비로 전해지는 호흡소리로 후배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후배는 선배의 말을 들으며 물 밖으로 나온다.
둘의 호흡만 중요한 게 아니다. 당시 세월호 참사 현장에는 선·후배·동료 잠수사 20여 명이 있었다. 이들은 해경의 지시에 따라 조를 편성해 차례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잠수사는 후임자에게 배 내부 상황을 설명하고, 해야 할 일을 전달해야 한다. 아무리 주의해도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작업이다. 공우영 잠수사가 나서 일을 챙겼다. 기술 전수 등도 그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해경과 계약을 한 건 아닙니다. 경력이 많고, 후배들도 저를 믿으니까 일을 맡은 거죠. 저는 해경 회의에 들어간 적도 없어요. 그들이 저에게 세월호 어디 어디를 수색해 달라고 하면, 제가 후배 잠수사들에게 전달하는 식이었죠."잠수사들의 작업 환경은 열악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했다. 초기엔 의료장비와 인력도 없었다. 애초 한 번 잠수를 하면 최소 12시간 정도는 쉬어야 한다. 하지만 찬 바다에 있는 애기들이 마음에 걸렸고, 그들을 기다리는 부모들이 눈에 밟혔다.
"'개집' 안에 시신 쌓아 올려라? 그게 할 소리인가"위험한 줄 알면서도 하루 3~4번 물에 들어간 잠수사도 있다. 한 번에 여러 명을 데려나올 수도 없다. 어둡고, 비좁고, 물이 꽉 들어찬 세월호. 한 번에 딱 한 명만 끌어안고 헤엄쳐 나올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전문가랍시고 뭐라는 줄 아십니까? 애기들 끈에 줄줄이 묶어서 한 번에 여러 명 데리고 나오면 되지 않느냐고. 참나…. 아니, 사람이 무슨 굴비인가요? 그렇게 죽은 것도 마음 아픈데, 애기들을 굴비처럼 엮어서 꺼내라고? 가능하지도 않고, 사람이 할 짓도 아니죠!"바다를 모르고, 물속은 더더욱 모르는 사람들의 말과 참견은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은 '개집'을 제작해 바다로 보냈다. 공우영 잠수사는 개집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