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희 씨 소망은 시어머님(좌축)과 오래 같이 사는 것이라고 했다.
신광태
"그것도 데이트라 해야 하나, 남편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을 때가 참 행복했었어요. 그 이는 부모님께 참 잘하셨어요. 돌이켜 보면 남편이 효자 상을 받아야 해요."한국전쟁 당시 14살 나이에 혈혈단신 월남하신 시아버님은 그야말로 억척이셨다. 1만평의 논과 밭을 직접 괭이로 일궜다. 단점도 있었다. 술만 드시면 주정이 심했다. 했던 말을 반복하고, 평소 불만을 술에 취하면 한꺼번에 쏟아냈다.
술이 깰 때까지 이어지는 잔소리. 남편은 피가 철철 흐를 때까지 맞아도 아프다는 말이나 원망 섞인 눈빛 한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위로하곤 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남편이지만 부모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단다.
지금 27살인 큰 아들을 낳았을 때 천정을 보니 얼음이 보였다. 위풍이 심한 방이라 신문지를 두텁게 깔아 놓은 방바닥은 절절 끓어도 천정은 얼음이 두껍게 얼 정도였다. 그런 환경에서 삼남매를 키웠다.
"아빠를 닮아서인지 아이들도 말썽한번 부리지 않고 농사일 다 하고 자랐어요."공부가 전부가 아닌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 말을 거역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부모는 또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큰 아들은 유기농 식품업에 종사하고 막내인 둘째 아들은 의류 업을 한다. 딸은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라 했다. 모두 부모 권유가 아닌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다.
"시아버님 암 투병하실 때 제일 힘들었던 때였죠."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묻자 신씨는 시아버님께서 암을 얻어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 드렸던 일을 떠올렸다. 암 판정을 받자 아버님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어려운 시기를 넘어 살 만한 환경이 되니 세상과 하직해야 한다는 아쉬움. 손자들의 결혼을 보고 가야한다는 미련, 할 일이 더 남았는데 삶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유 없이 화를 내고 가족에게 하루 종일 훈계를 하는 날이 잦았다. 대수롭지 않은 말에 노여워하곤 했다. 그럴 땐 늘 술을 드셨다. 눈치를 챈 아이들은 밖을 맴돌았다. 몇 년간 그런 생활이 반복되었지만 아버님 말씀 한번 거역하지 않았던 사람이 남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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