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열 하면 우리는 입시경쟁을 떠올린다. 교육열을 우리는 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하지 않고 남을 제치고 올라가는 이기주의적 교육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교육열을 꼭 그런 식으로 해석해야만 할까? 우리 대한민국 사회를 이끌어 온 것이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국인의 교육열을 정상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측면이라 함은 그야말로 배움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말한다. 배우고 싶어 서당에 가고 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출세 운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오늘은 개화기이후 우리나라 국민들의 교육열이 어떻게 분출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의 개화기는 강화도 조약 이후이다. 말이 조약이지 이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손목 비틀기에 우리 조정이 당한 것이다. 조약을 맺으러 나간 관료들이 '우리 조선과 일본은 원래부터 통상을 해오던 관계인데 무슨 조약이 필요하겠수?'라고 하면서 조약의 내용도 잘 모르면서 도장을 찍었다. 조약에는 일본이 우리 해안을 마음대로 측량한다는 것도,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죄를 지어도 일본으로 데려가 재판을 받게 하겠다는 것도 들어있는 줄 모르는 멍청한 조선관료들이었다. 녹(祿)은 왜 먹냐? 그 이후 일본만이 아니라 서구 여러 열강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건 필연의 순서였다. 이때부터 조선에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게 된다.
위기에 봉착하면 우리 민족은 스스로를 구해왔다. 왕이나 지도자들이 망쳐놓은 나라를 국민들이 구해왔다. 가까이는 IMF 때 금모으기 운동 그리고 구한말과 임진왜란 때의 의병들 등등 나라를 구하고자 민초들은 분연히 일어섰다. 개화기 당시 백성들은 몰려오는 일본상인들에게 위기감을 느꼈다. 세도정치 및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서양 문물에 대하여 눈도 뜨지 못했던 백성들에게 개화는 위기였다. 필요한 건 배움이었다. 백성들은 사학을 세워 발달된 서구문물을 배우고자 하였다. 원산에서 최초의 근대적 사학이 세워졌다. 원산학사.
원산학사는 당시 개화파 관료였던 덕원부사 정현석과 주민들이 협력하여 설립하였다.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장이 된 원산의 민중들이 일본 및 외세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만든 것이다. 원산학사는 외국학교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서당을 개량하여 교육하였다. 원산학사는 공통과목으로 산술, 물리, 기계기술, 농업, 외국어등을 학습했으며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이외에도 외세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교육기관들이 붓물처럼 터져나왔다. 우선 정부에서 만든 육영공원이 있다. 영어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육영공원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교육했는데, 좌원은 과거급제자와 현직관리를 뽑았고 우원은 아직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거나 관리가 되지 못한 사람들 즉, 유생들 중에서 선발하여 교육시켰다. 원산학사가 최초의 근대적 사학이라면 육영공원은 최초의 근대적 관학이다.
조정의 교육의지는 고종의 교육입국조서에서 더 절실하게 드러난다. 처음 몇 구절만 옮겨본다. "세계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부하고 강하며 독립하여 웅시하는 나라는 인민의 지식이 개명하였도다. 이 지식의 개명은 곧 교육의 선미로 이룩된 것이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전하는 데 근본이라 하겠도다. 그러므로 짐은 교육의 책임을 스스로 지노라."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정의 교육입국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개화기때는 이렇게 민관이 서로서로 교육을 통해 하루빨리 인재를 양성하여 몰려드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에 맞서고자 애를 썼다. 1900년대 초 한일합병이 되기 직전까지 이러한 민족사학은 약 5천 개에 달할 정도로 우리 민족의 교육에 대한 열망은 높았다. 나라가 어려우니 너도나도 하루빨리 유능한 후진들을 양성해 국난을 헤쳐나가고자 한 우리 선조들의 헌신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한 이 개화기의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계 선교사들에 의한 근대학교들이다. 기독교계 선교사에 의한 최초의 사학은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이다. 이외에도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 스크랜턴 여사가 세운 이화학당이 1886년에 세워져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로서 여성교육기관의 효시가 된다.
이렇게 조정의 노력, 선교사들의 건학, 그리고 민족선각자들이 세운 학교들 모두 교육을 통하여 나라를 구하고자하는 뜨거운 열기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불길처럼 번져가는 사학을 통한 구국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지는 데 그것은 바로 일본인에 의해 조종되던 통감부가 1908년에 발표한 '사립학교령'이다. 즉, 아무나 학교를 세우지 못하게 하고 세워진 학교도 6개월내에 재인가를 받도록 해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학교만 운영하게 하려는 탄압이었던 것이다. 당시 신문을 보면 사립학교를 설립하려면 거액의 기부금을 내야한다고 되어있는데 3000원이라고 하니 당시 시가로 그런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민족사학들은 제재를 받게 되고 일본의 의도대로 친일교육이 이루어지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으로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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