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부터 일한 동생, 29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삼성전자 LCD 공장서 근무 후 폐암... 산재인정 받지 못한 채 사망

등록 2015.12.28 14:53수정 2015.12.28 14:53
10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근무한 후 폐암에 걸렸던 이지혜님(1986년생, 여성)이 3년 여의 투병 끝에 오늘(27일) 낮 12시경 눈을 감았다"고 시작하는 추모 성명이 반올림에 올랐다.

그녀의 상태가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혜씨의 이름을 이렇게는 만나지 말기를 바랐었다. 처음 반올림 활동을 시작하여 상담하기 위해 만났기에 애착이 갔고, 업무 위험성을 얘기하다가도 금세 아무 일 없다는 듯 장난치며 서로를 챙기는 가족들 모습에 그렇게 오랫동안 살겠거니 했다.

일 년도 더 뒤 인터뷰 하러 전주를 찾았을 때도 여름에 놀러 많이 갔다며, 오빠랑 장난치며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깔깔거리며 웃던 그녀였다. 그랬던 지혜씨가 다신 돌아오기 힘든 여행을 떠났다니 믿기지 않는다.

17세에 입사, 7년 동안 고된 노동

전주한옥마을 전동성당에서 2014년 8월 지혜씨(오른쪽)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났다. 여행을 좋아하는 지혜씨는 서울에서 온 나에게 성당을 구경시켜 주었다. ⓒ 반올림


지혜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안 생계를 돕기 위해 삼성전자 LCD 공장에 취직했다. 2003년 12월부터 2011년 5월까지 7년 5개월 동안 일했다. 남들보다 꽤나 긴 편이었다. 지혜씨는 인터뷰에서 그 일은 오래 하기는 어렵다고 말했었다. 일하던 중 각종 유기용제 냄새와 무언가 타는 듯한 정체 불명의 냄새들을 계속 맡아야 했고, 동료들이 피부질환, 생리불순, 유산 등을 겪었다는 것이다.

"주변 언니들만 봐도 그래요. 일한 지 얼마 안 된 애들은 결혼해도 아이도 잘 생기고 그러는데, 오래 근무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겠다 하시는 분들은 임신이 안 되거나 유산되거나 그런 경우가 많아요. 왜냐면 몸이 그만큼... 화학약품이라든가, 운동이나 영양도 그렇고, 그만큼 몸이 안 좋거든요. 교대니까 밥 챙겨먹기도 그렇구요. 제가 건너서 아는 한 언니는 임신이 안 되니까 번 돈을 거의 다 시험관 하는 데 쓰신 분도 있었거든요. 그런 거 봐도 오래 있을 만한 데는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2013.8.29 지혜씨와의 인터뷰에서

지혜씨는 17세에 입사하여 삼성전자 천안사업장과 탕정사업장에서 근무하며 생산 중인 LCD 판넬의 화질검사·가압검사 등을 하여 불량품을 찾아내는 일, 불량품을 폐기하는 일, 설비와 작업장 바닥을 유기용제로 청소하는 일 등을 했었다.


7년 동안 고된 노동을 하며 미뤄왔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멀리 여행도 가고 싶었고 영어 공부도 하고 싶었던 지혜씨는 퇴사하자마자 필리핀에서 짧게 어학연수를 했었단다. 그 때를 가장 즐거운 시간으로 꼽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수술과 항암치료에 따른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이어가던 지혜씨를 반올림에 알린 건 지혜씨 오빠였다. 오빠는 지혜씨에게 큰 힘이었다. 상담 중에도 생각이 잘 안 날 때는 오빠의 무릎을 토닥이며 '뭐였지?' 하며 어렵사리 떠올리곤 했다. 독한 약 때문에 빨리빨리 생각이 안 나서 그런다며 오빠는 동생 대신 설명해주었다. "제 동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라며 부고 소식을 전한 이도 오빠였다.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못 받은 채

75명의 죽음을 기리는 퍼포먼스 반올림에 제보된 75명의 삼성직업병 사망자들을 대신해 방진복을 입고 삼성본관 앞을 행진한 날이 지난달 13일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오늘 12월 27일, 76번째 안타까운 생명을 떠나보냅니다. 삼성은 직업병 문제에 책임져야 합니다. ⓒ Taekyong Chung


지혜씨는 2013년 7월 폐암에 대한 산재신청을 했었다. 근로복지공단은 한참 뒤인 2015년 1월에야 "정확한 유해물질 노출정보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산재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천안사업장 3-4라인이 이미 철거되어 남아있지 않았고, 지혜씨가 수동으로 했던 일들은 모두 자동화가 되어 있던 터였다.

SK하이닉스는 "현재까지 국내외 반도체 역학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관련성을 평가할 수 있는 질환군"이라며 폐암을 보상 대상으로 포함했지만, 삼성이 만든 보상위원회에서는 폐암을 배제하고 있다. 결국, 지혜씨는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쿵짝쿵짝 ~ 제일 좋아' 이거 아세요? 꽃봉오리 예술단이라고, 무대에서 그거 패러디도 했어요."

앉아서 주로 일하다 회사에서 하는 체육대회나 장기자랑에 신나했던 지혜씨. 17세에 입사하여 10대 후반과 20대의 절반 이상을 고된 노동으로 보냈고, 27세에 폐암에 걸린 후에는 고통스런 투병으로 보내다가 2015년 12월 27일, 만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삼성전자 반도체, LCD 사업장에서 병을 얻어 숨진 이는 지혜씨로 76번째다. 하필 너무 추운 날 가셔서 더 마음이 시리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권영은님은 반올림 활동가입니다
#삼성직업병 #삼성LCD #반올림
댓글10

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