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발언 경청하는 오바마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월 1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계속 남겨놓는 것은 어떨까? 단견으로는, 장기적으로는 이 문제는 일본에 유리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문제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비난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은 피해자들이 아직 생존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모두 세상을 떠난다면?
더 이상 그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할 사람도 없고, 한 맺힌 증언을 해줄 사람도 없고, 그 생생한 분노와 울분의 감정을 표현할 사람도 없다. 이 문제에 관한 기록은 문서로만 남을 것이다. 물론 그 기록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가슴 아파하고 일부는 분노하겠지만, 잉크는 마르기에, 글로 남은 기록물 또한 마음을 건조하게 만들 뿐이다. 피해자들이 살아있고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날 때마다 해당 만행에 대한 격양된 감정은 고조되겠지만, 마지막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는 점점 사그라들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시간이 갈수록 일본이 불리하지만, '피크'를 넘기면 시간이 갈수록 일본에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강력한 패를 쥐고 있을 때 시간이 지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다. 일단 그런 이익과 힘의 측면을 떠나서,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결하는 것이 도리에도 맞고 할머니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장기적으로는 시간을 끌기보다는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어찌 보면 그런 양측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에 결국 이번에 합의가 발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그런 시기적인 고려 때문에 합의에 이른 것인가? 사실 시기적으로 그것이 '좋다'라는 것일 뿐이지 이것이 일국을 움직일 만큼의 큰 동인은 되지 않는다. 결국 움직이게 된 이유는 미국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나쁘면 미국에게는 좋을 것이 전혀 없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편을 결집해야 하는데 한·일이 반목하면 안되니까.
그런데 미국은 한국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다, 일본이 위치상으로 훨씬 더 중요한 국가이기도 하고,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이니까. 그렇다고 일본의 편을 들기는 또 어렵다. 한국은 미국에겐 큰 도움을 줄 만큼의 강력한 국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중국편에 붙으면 엄청 골치아플 정도의 힘을 가진 국가이기는 하다. 미국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이런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그렇게 강력하게 뒤에서 압박하려고 했을까? 여기서부터는 추측의 영역이므로 섣불리 재단할 수는 없다. 다만 2000년대 이후 중동 쪽에 힘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후방'을 튼튼하게 해두고 싶은 생각은 컸을 것 같다. 중국은 2000년대 초반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다. 더욱이 미국은 최근 IS 격퇴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 속에서 힘을 분산시키기가 어렵다.
IS 격퇴에 힘을 기울이는 이유는, 이것이 (미국 정책결정과정에서는 전통적으로 제1순위였던) 유럽의 안보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신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내용이다. 혹시 보도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해보는 또 다른 추측은 '북한 변수'도 의사결정에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북핵개발이야 오랜 이슈이지만, 최근에는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북한이 SLBM 개발에 성공한다는 것은 미국으로선 아주 중대하고 심각한 안보위협이다. 북한에 대하여 갖고 있는 핵 억지력이 무력화되는 사건이기도 하고. 따라서 북한을 거세게 밀어붙이기 위해서 일단 '같은 편'이어야 할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키려는 생각도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정권이 바뀌기 전 오바마 행정부가 '업적'을 남기려는 것도 일부 작용했을 것 같다.
그러면 일본은 왜 위안부 합의에 나섰을까?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와의 연관성을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이, 이 문제에 관하여 양국이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비난하지 않겠다는 부분이 합의에 포함된 것 때문이다.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은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국가들의 반대이며, 그 선봉장에 중국과 한국이 있다. 이번 합의가 도출된다고 한국이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적어도 도덕적 이유로 반대하지는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일본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동인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이 코너에 몰려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 협상하는 것이 일본 측에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미·영·프·독 등의 주요 언론에서 가끔 보이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인식은 매우 좋지 않다. 심지어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서는 대놓고 비판하는 사설까지 쓸 정도니까. 그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기존 방침을 마냥 고수하며 버티는 것은 여론전에 있어서 한참 불리하다는 것을 간파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미국이 계속 푸시하는 마당에 '이왕 해야한다면 지금'이라는 생각으로 전격적으로 협상에 나섰으리라 보인다.
어쩌면 미국에서 당근을 같이 제시했을 수도 있다. 연준 금리를 인상하는 것이 양적완화의 출구전략이라면, 일본의 통화팽창 유지로 인한 엔화 약세를 묵인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사실 버틸 명분이 별로 없다. 여론이 좋지 않은데 버티면 더 곱지 않게 바라볼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일본 측에 명분만 줄 수도 있다,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한국이 고집을 피워 무산되었다'와 같은 형식으로. 그뿐만 아니라 위에서 이야기했듯 우리 처지에서도 계속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것도 없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강경히 버티고는 있지만 어차피 그건 국내 정치 때문이지 고위 의사결정자들은 아마 국제법적으로는 불리하다는 것을 예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박근혜'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단단한 지지층이 있고, 야당이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는 마당이므로 이것을 타결한다고 해서 국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도 '박근혜'이기 때문에 추진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65년은 3공화국 시절이고, 마침 올해는 한일청구권 협정으로부터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상당히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어쩌면 KF-X사업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깐 든다. 화해를 대가로 기술이전에 미국정부가 전향적으로 나서준다거나. 이것은 추후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진행된 협상, 결과 그리고 남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