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엄마 디스, 왜 기분이 좋지?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⑭] 꿈 발표 대회

등록 2016.01.10 20:50수정 2016.01.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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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동고등학교 꿈 발표 대회 반 대표로 나간 제굴. 떨려서 눈 앞이 캄캄, 마이크를 잡는 것도 할 수 없었다고. 김나라 선생님이 옆에서 마이크를 잡아주셨다. ⓒ 배지영


"엄마, 카드! 카드 챙겼어요? 모임 가서 아들 자랑 많이 하고요. 꼭 커피 사세요."


언제부터였을까. 자식 자랑을 하는 사람은 밥이나 차를 사야 한다. 반장이 됐거나 1등을 했을 때. 모범 어린이상을 받거나 달리기 1등을 해도 그렇다. 그런 경사는 다른 아이들의 몫. 제굴은 '무욕의 아이'. 관심 없었다. 나는 가끔씩 "우리 아들 덕분에 엄마는 돈 아끼고 좋아"라고 말했다. 그런데 제굴도 뭔가를 하고 말았다. 학생 경력 10년 차에.

2015년 12월 28일. 제굴이 다니는 군산 동고등학교에서 '꿈 발표 대회'가 열렸다. 기말고사 끝난 직후였다. 제굴의 꿈은 주방장, 작은 식당을 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A4 아홉 장짜리 프리젠테이션 문서를 만들었다. 반 친구들은 시험공부 하느라 준비를 많이 안 한 모양. 제굴이가 1학년 6반 대표로 나가게 됐다. 제굴 자신도 예상 못한 결과였다. 

"발표자로 나가려니까 너무 떨렸어요. 나는 누구한테 시선받는 거 싫어서 그런 거 안 해봤잖아요. 내가 네 번째 발표자인데 앞에서 애들이 말하는 게 하나도 안 들렸어. 그냥 눈앞이 캄캄했어요. 마이크 잡을 줄도 몰랐지. 김나라 선생님이 마이크 잡아주러 와서 옆에 서 계시니까 한결 낫더라고요. 준비한 게 생각이 안 나서 애드립하면서 넘어간 것도 있어요."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일도 많은 월요일 오전, 만사를 제쳐두고 갔다. 남편한테는 "초딩도 아니고, 무슨 고등학생들 꿈 발표 대회에 학부모를 초대하냐"라면서 웃었다. 남편은 "역사적인 날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동영상 잘 찍어와"라고 말했다. 보러 온 학부모는 10명 안팎. 시작부터 경쾌했다. 교장선생님 인사말이 무척 짧아서 그렇게 느껴졌다.

제굴의 차례. 사회를 보는 김나라 선생님은 제굴을 "1학년 중에서 가장 꿈이 확실한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순간, 울컥했다. 선생님이 극찬을 해서 그런 게 아니다. 담임선생님도 아닌데 우리 큰애를 알고 있어서 그랬다. 중학교 때 제굴 담임선생님은 종례시간에 갑자기 "너는 몇 반인데 여기 와 있냐"라고 물은 적도 있다.


'아빠 표 손맛 밥상', 빵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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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과 나는 <아따맘마> 만화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그집 식구들은 찬바람이 불면 어묵전골을 먹었다. 그래서 제굴은 한번 해 봤다. 어묵 음식은 다 만들고 나면, 뭔가 엄청나게 풍성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 배지영


제굴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혼자 밥을 차려 먹는다는 것과 저녁이면 식구들이 먹도록 밥상 차린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자신이 한 음식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첫 번째로 나온 어묵전골. 나는 어린 제굴과 <아따맘마>라는 만화영화에 열광했다. 찬바람이 불면, 그 집 식구들은 어묵전골을 먹었다. 제굴은 그게 생각난다고 글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제굴은 어묵을 먹지 않는다. "생선 그대로 먹어야지, 어묵은 별로야"라고 말한다. 학생 때부터 떡볶이를 좋아했던 나는 뜨끈한 어묵도 좋아한다. 제굴은 순전히 엄마 때문에 무와 멸치·다시마로 육수를 내서 어묵전골을 했다. 음식을 다 만들고 나면, 뭔가 엄청나게 풍성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 좋은 음식이라고 레시피 노트에 적어놨다.

"다른 사람들은 엄마 표 밥상이라고 하지만 저희 엄마는 요리 솜씨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매일 먹는 밥을 아빠가 해주십니다. 이유식부터 소풍 김밥까지 다 아빠가 해주셨습니다. 저한테는 아빠표 손맛 밥상입니다."

후반부로 가면서 제굴은 준비한 대로 잘 읽었다. 긴장이 풀려가는 모양이었다. '아빠 표 손맛 밥상'이라는 말에 학생들은 빵 터졌다. 나도 제굴의 요리 못하는 엄마가 아닌 척 하며 따라 웃었다. 제굴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호주로 가서 음식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윤용호 담임선생님 덕분에 쓰는 영어 레시피 노트까지 자랑하고 발표를 끝냈다.    

그날 저녁, 우리 부부는 꿈 발표 대회에 나간 제굴이의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다음 날에는 동생 지현에게 열 번도 더 얘기했다. 제 언니가 세련되지 못한 행동을 할 때마다 '늙수그레'라고 놀리는 지현은 "우리 제굴이는 타고 났어, 한 번 본 것도 다 따라서 만든다니까"라면서 맞장구를 쳤다. 새해 첫날, 식구들이 다 모인 시가에서도 제굴이 자랑을 좀 했다.

"엄마 어릴 때 꼬막 많이 먹었거든, 진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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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 저녁에 제굴이 차린 밥상. 엄마가 좋아하는 샐러드와 자기가 좋아하는 리조트 조식 느낌으로 차렸다. ⓒ 배지영


삶은 계속된다. 며칠도 못 가서 본성이 나왔다. 내 눈에서는 광선이 나왔다. 영원할 것 같던 아들 자랑은 멈췄다. 지난 5일이었다. 오전 6시에 혼자 일어나서 동네 공원에 다녀온 제굴은 온종일 잠만 잤다. 화장실에 갈 때도 잠에 취해서 비틀비틀 걸어갔다. 유치원 방학한 꽃차남을 방치한 채로 밥벌이 하는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강제굴, 엄마 씨름 왕 출신인 거 알지? 오전 6시로 맞춰놓은 알람 꺼라."
"안 그래도 껐어요. 진짜 함부로 산에 가는 거 아니야."

지난 6일. 제굴은 아빠가 차려놓은 아침을 먹고는 침대로 갔다. 엎드려서 음식만화책 <오므라이스 잼잼>을 읽었다. 낮에는 수육을 해서 밥상을 차렸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동생한테 간식을 만들어줬다. 밥벌이 중인 내게 카톡으로 "저녁에 파스타 어때요? 명란 파스타"라고 물었다. 나는 우선 침묵 그리고는 "별로"라고 했다.

제굴은 집에서 3분 거리인 시장으로 갔다. 파스타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명란을 샀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맛이 궁금했다. 꼬막도 샀다. 며칠 전부터 시도해보고 싶었던 음식재료였다. 집에 와서 꼬막을 굵은 소금으로 박박 씻고는 맑은 물로 또 씻었다. 어간장, (양파 장아찌에 있던) 홍고추에 설탕과 후추를 넣어서 양념장을 만들었다. 

"까야! 완전 멋지다. 근데 제굴아, 꼬막 어떻게 삶았어?"
"책에 꼬막 삶는 거 나와요. 국악인 신영희씨가 너무 많이 익히지도 말고, 너무 조금 익히지도 말래요. 꼬막이 스스로 입 벌릴 때까지 삶으면 안 된대요. 나는 처음 삶으니까 이때다 싶을 때 꺼냈지."

자랑하고 싶은 제굴은 아빠한테 전화해서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늦어, 왜?" 라고 묻는 남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엄청난 속도로 꼬막을 까먹으면서 "엄마 어릴 때 많이 먹었거든, 그때보다 더 맛있다야"라고 말했다. 제굴도 맛있다고 했다. 하지만 꼬막을 씻을 때는 뭐가 많이 나와서 먹고 싶지 않았다고. 수북하게 쌓인 꼬막 껍질을 치운 제굴은 말했다.

"엄마, 내일 아침 메뉴 뭔 줄 알아요?"
"모르징. 아침부터 고기는 안 돼."
"꼬막 어때요? 아직도 많이 남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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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 꼬막은 너무 많이 익히지도 말고, 너무 조금 익히지도 말고 적당히 익혀야 한다고. 처음 삶는 제굴은 이때다 싶을 때 꺼냈다고 한다.^^ ⓒ 배지영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꿈 발표 대회 #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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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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