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두고 포대기만 챙겨오다

[원주나들이⑮] 겨울 나그네 (1)

등록 2016.01.10 16:47수정 2016.01.1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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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대산 월정사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2008. 3. 촬영)

오대산 월정사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2008. 3. 촬영) ⓒ 박도


여행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고 한다. 여행 마니아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네 계절의 여행은 그 나름 장단점이 있지만, 진짜 여행은 '겨울여행'이라고 한다. 봄은  화려하고, 여름은 피서 인파에 질리고, 가을 역시 화려함과 단풍객 인파에 피로하다. 삭막한 겨울, 아니 폭설로 뒤덮인 겨울도 좋다. 고요한 산중 오두막집에서, 또는 산사에서 고즈넉이 맞는 원형 그대로의 겨울밤은 비로소 잃어버린 자아를 찾을 수 있다.   - 기자 주


오대산장 찻집

나와 다르게 사는 사람을 만나는 여행 ….
하늘에 별이 지상에 내려와 사는 풍경- 그 속으로 가시오.
-오대산장 앞 안내 팻말에 쓰인 말


a  오대산장 안내 팻말 글

오대산장 안내 팻말 글 ⓒ 오대산장주인 박미숙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게 인생사라고 하더니, 요즘 나는 '겨울 나그네'로 오대산 월정사에서 지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금 나는 호젓한 오대산장 찻집 훈훈한 나무난로 곁에서 뜨거운 원두커피를 마시며 이 기사를 쓰고 있다. 이렇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지난해 12월 16일은 나의 만 70세 생일이었다. 사실 그동안 우리 집에서는 생일이니, 회갑이니 이런 날을 야단스럽게 보내지 않았다. 내 회갑 일이었던 2005년 12월 7일에도 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출근하여 한국전쟁 관련사진을 검색하고 이를 스캔하였다.

내 지난 70년을 돌이켜 보면 나는 '휴가'란 말은 어색할 정도로 늘 일에 묻혀 살았다. 군 복무시절도 전방에서 소총소대장 보직으로, 단 한 차례도 정기 휴가 혜택을 받지 못하고 기껏 1박 2일 외출이나 2박 3일 여름휴가로 만족한 채 전역했다.


학교에 교사로 재직할 때도 국어과목은 중요교과라 하여 보충수업이라는 이름으로 방학기간 절반은 출근하였거나, 또는 교지편집지도교사로, 보직으로 입시철인 겨울방학은 반납하다시피 지냈다. 10여 년 전, 조기퇴직을 하고 강원산골로 내려온 뒤도 반거들충이 농사꾼으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작가로 주경야독의 세월을 보냈다.

망연자실하다


지난해 가을, 딸 아들내외가 서로 상의하여 내 고희 날을 전후하여 일찌감치 따뜻한 남쪽나라 휴양지에다 우리 부부가 한 달간 머물 수 있게 숙소를 마련해 둔 모양이었다. 나는 모처럼 그들이 베푼 정성이 갸륵하여 그 제의에 동의했지만, 어쩐지 한 달은 너무 긴 것 같아 한두 주로 단축시키고 싶었지만 예약 변경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참에 그동안 써둔 작품을 퇴고하거나, 새로운 작품을 써야겠다고 여러 자료를 노트북과 외장 HDD에 잔뜩 저장시켰다. 그런 뒤 참고할 책도 줄이고 줄여서 6권이나 가방에 담았다. 지난달 14일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른 뒤 기내에서 두어 시간 보내자 지루하여 선반에 휴대용 가방을 꺼내 노트북을 찾는데 보이지 않았다. 순간 눈앞이 컴컴했다.

순간, 나도 별 수 없이 이제는 늙었다는, 아마도 이게 치매의 초기 증세가 아닐까 하는 그 절망감에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기억을 더듬자 노트북을 집에 두고 떠났는지, 인천공항 검색대에 두고 떠나왔는지 그것조차도 분명치 않았다. 망연자실한 내 표정을 읽고 아내가 한 마디했다.

"아이는 두고 포대기만 챙겨 왔구먼요."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영판 그 짝이었다. 나는 노트북을 어디다 두었는지 그것조차 불분명하니까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깜깜하기만 했다. 휴양지에 도착 후 짐을 풀자 노트북 외에는 코드, 외장 HDD, 등 부속품은 다 챙겨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 전화는 로밍조차 하지 않았기에 도착 후 딸과 며느리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그들이 먼저 원주 집으로 확인하였다.

마침 집을 지키고 있던 조카가 집에는 없다고 하여, 다시 인천공항 유실물센터로 연락을 했다. 그러자 그날 4대의 노트북이 유실물로 들어왔다고 하기에 노트북 덮개에 삼성서비스센터 기사의 명함과 원주역 열차시간표를 붙여두었다고 하자 아가씨는 단박에 그 노트북은 잘 보관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90일 동안은 보관할 거라고 했다.

애인을 두고 왔으니

나는 일단 안도는 했지만, 목숨 건지면 보따리 찾고 싶다는 말처럼 그 노트북을 내 숙소까지 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도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자칫하다가는 도중에 노트북을 파손 또는 분실할 우려도 있기에 내가 인천공항에 돌아가는 날 직접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아들이 초중고교 다닐 때 컴퓨터에 빠져 밤낮도 모른 채 자판만 두들길 때 "사람이 기계의 노예가 되었다"고 무자비하게 코드를 뽑아 내 방 머리맡에 두면서 야단쳤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그때의 아들 이상으로 노트북이 없으니 몸이 뒤틀리고 글 한 줄 쓰지 못하는, 마치 아편중독자가 약 기운이 다된 사람처럼 정서가 불안전해진, 그야말로 내가 완전히 기계의 노예가 돼 버렸다.

지난날 워드를 먼저 배운 후배나 친구들이 "한 번 배워 봐.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데 아직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소?"라는 핀잔을 받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너희들이 뭐라고 하든지 나는 작품만은 영혼을 담은 육필로 쓸 거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그 뒤 생활기록부 전산화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워드를 배우고는 그 편리함과 시대조류에 발맞춰야 하는 직장인 기본 자세, 그리고 변화무쌍한 문명의 이기 앞에 그만 손을 바짝 들고 말았다. 더욱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워드에 익지 않고서야 어찌 명맥을 유지하겠는가.

휴양지에서 별로 하는 일없이 며칠을 보내자 마침내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할 일 없이 노는 게 그렇게 따분할 수 없었다. 언젠가 한 퇴직 교장 선생님은 하루 종일 노는 일이 가장 고역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제야 그 말이 실감났다. 잠도 일을 하다가 잠깐 눈을 붙일 때 달고 맛있지 맥없이 잠자는 일도 지겨웠다. 나는 휴양지에서 닷새 후 조기 귀국을 선언하고 아들을 앞세워(운전면허증이 없기에) 현지 항공사를 찾아가 별도의 수수료(charge)를 물고 지난해 12월 22일 비행기 표를 바꿨다.

"애인을 두고 왔으니 먼저 가세요."

아내의 말을 뒤로 한 채 그날 밤 인천행 여객기에 올랐다. 참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사람이다.

a  오대산장(이번 여행에는 일부러 카메라를 휴대치 않아 하는 수 없이 철 지난 사진을 오대산장 주인에게 빌려 싣는다)

오대산장(이번 여행에는 일부러 카메라를 휴대치 않아 하는 수 없이 철 지난 사진을 오대산장 주인에게 빌려 싣는다) ⓒ 오대산장주인 박미숙


#겨울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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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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