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성 테스트우리에게 첫번째 '시험의뢰'가 들어왔다.
강상오
새로운 업무가 주어지고 우리는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야간 비상대기 근무를 했다. 낮 시간 동안 파견을 나간 부서에서 연구 보조 업무를 하고 저녁 시간부터 신뢰성 센터에 상주를 한다. 환경 챔버에는 항상 테스트를 진행하는 제품들이 들어가 있었다. 한번 들어간 제품은 일주일씩 연속으로 테스트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한밤중에도 장비는 계속 가동됐다.
비상 대기자는 시간대별로 신뢰성 센터 순찰을 돌면서 '장비는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고 있는지', '환경 챔버 안에 넣어 놓은 제품이 쓰러지거나 해서 깨지지는 않았는지' 점검 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새벽에는 신뢰성 센터를 청소한다. 출근 하는 사람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하라는 사장님의 지시였다.
내가 산업기능요원이 되고 처음으로 QC(Quality Control)가 되어 부품 신뢰성 테스트를 할 때 환경 챔버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때 사용하던 챔버는 책장만한 크기로 고온 테스트를 할 수 있게 만든 장비 수준이었는데 이 대기업에 설치된 챔버는 드넓은 신뢰성 센터에 룸식으로 설치가 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설비였다. 또한 영하 40도에서 고온 80도까지 급격한 온도 변화와 더불어 습도까지 마음대로 조절을 할 수 있었다.
사장님은 그 환경 챔버의 관리를 우리가 맡길 원하셨다. 지금은 단지 야간에 비상 대기를 하면서 안전 사고를 예방 하는 수준이지만, 우리가 환경 챔버의 오퍼레이터가 되어서 연구원들이 우리에게 제품만 맡기고 테스트 의뢰를 하면 우리가 대신 테스트를 진행하고 결과 리포트까지 뽑아서 연구원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하셨다.
사장님의 그 의견은 곧 우리 회사를 담당하는 연구소 기획부서에 전달 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연구 보조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경 챔버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했다. 그 문제는 어마 어마한 대기업의 백그라운드를 이용해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은 바로 환경 챔버 회사에 연락해서 교육을 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환경 챔버를 납품한 회사의 엔지니어에게 교육을 받았다. 챔버를 수리하거나 챔버에 대한 기술적인 교육이 아닌 운용을 위한 오퍼레이팅 교육이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몇시간의 교육과 몇번의 실습으로 우리는 환경 챔버의 오퍼레이터가 되었다.
환경 챔버를 능숙하게 다룰줄 알게 되었지만 연구원들은 우리에게 테스트를 맡기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밤을 새워가며 만든 자신의 제품을 자식같이 생각했으므로 자식을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아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우리들의 테스트 역량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아 못 미더워서 의뢰를 하지 않는 이유가 가장 컸다.
우리 회사를 담당하는 기획부서 연구원이 신뢰성 센터에 테스트를 의뢰하지 않는 이유를 파악해 보았다. 그 결과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연구소로 들어온 외부 인력들은 '연구 보조'일 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 불신의 벽을 넘어야했다. 그래야만 단순히 '연구 보조'를 넘어 신뢰성 센터 '담당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담당 연구원과 함께 Gage R&R(측정의 정밀도를 나타내는 에러 수준) 이벤트를 준비했고 그 결과를 전체 연구소에 배포하면서 우리의 테스트 역량이 신뢰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 홍보 메일이 뿌려지고 난 뒤 밤샘 테스트에 지친 연구원 한 명이 찾아와 우리에게 테스트를 의뢰했다. 그 연구원도 우리들의 역량을 못미더워 하는 눈치였는데 도저히 피곤해서 직접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아 우리에게 대신 맡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진 시료(테스트 샘플) 3대와 테스트 항목이 쓰여진 '시험 의뢰서'는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첫번째 자체 시험이 진행되던 날 우리는 사장님을 포함한 10명이 모두 모여 함께 그 테스트를 진행했다. 소중하게 찾아온 기회에 너도 나도 계측 장비를 한 번 잡아보겠다며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장님도 아주 흡족해 하셨다. 이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 사이에서 한참이나 부족한 고졸 학력의 우리들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공유하기
연구소 옆 샤워실과 세탁기, 침대가 말해주는 것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