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사사키 후미오 지음·김윤경 옮김·비즈니스북스·276·1만 3800원)
비즈니스북스
인간은 발산하는 존재다. 정확히는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과 그로부터 생기는 부산물이 쉼 없이 쌓이는 더깨의 존재다. 이러한 존재들에게 버리고 정돈하는 일은 스스로를 중화하려는 본능적인 욕구의 일환이다.
이는 첫째로 버리고 정리하는 작업이 유난스럽게 분석의 대상이 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며 둘째 '최초의 미니멀리스트란 누구일까? 혹은 최초의 미니멀리즘은 무엇일까?'와 같은 우문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지금 트렌드와 같은 환원주의적 성격의 미니멀리즘을 사조의 형태로 처음 갖기 시작한 것은 추상화가 피트 몬드리안이 주도한 데 스틸(De Stijl)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이론은 독일의 조형학교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주었고 바우하우스의 예술가들은 덩굴이 꾸불거리는 아르누보 양식에 맞서 말 그대로 미니멀한 가구 제작과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냥 옷가지 몇 개와 잡동사니를 버리라는 책을 읽는데 무슨 바우하우스며 몬드리안이 튀어나오는지 의아할 것이다. 레스 이즈 모어(Less is More)라는 미니멀리즘 사조의 강령은 매우 직관적이라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회화, 디자인, 문학 등 미니멀리즘이라는 현상은 각각의 영역에서 분기점이 되는 위치에서 등장했다.
즉 미니멀리즘은 종착역이 아니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그것은 완성적 모습이 아니고 이는 대다수의 우리가 미니멀리스트로 끝까지 남을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타 문예 사조에서 등장한 미니멀리즘의 선례를 살펴보는 것은 최근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선 미니멀리즘을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도움을 줄 것이다.
잡동사니, 인간관계, 잡념까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버리고 그만큼 자신의 삶을 넓게 혹은 깊게' 영위하라는 말이다. 이는 사실 기존에 있던 '선택과 집중'을 물리적으로 치환한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면 그저 버리고 비우라는 행동 양식에 유별한 스타일이 새로이 등장할 것을 기대하는 게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사실 그것이 현대인이 미니멀리즘에 환호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현재의 우리는 과잉의 존재다. 외압(Stress)이 많고 이로 인해 생각이 많다. 그래서 이야기하고 싶고 들을 여유는 부족하다. 그래서 틈만 주면 꼰대처럼 자신의 지식을 늘어놓으려는 인문학자들의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깔끔한 인터페이스로 내 얘기를 돋보이게 해주는 채널(SNS)은 환대받는다.
우리는 하루 종일을 누군가에게 훈계 받거나 결핍의 존재라며 교육 받는다. 온 국민이 지금의 상태에서 나아가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무언의 채찍에 하루 온종일 등짝을 두드려 맞는다. 강박에 쫓겨 꾸벅꾸벅 졸면서도 이어폰으로 영어 회화를 듣는다.
또 힘들게 번 돈으로 만고의 진리를 전해줄 철학이나 인문학 도서가 아닌 내가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는 컬러링북(Coloring Book)을 사곤 한다. 우리가 멍청해서, 혹은 돈 귀한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배우고 너무 힘들게 벌어서 색칠 공부 책이나 사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미니멀리즘의 플랫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미니멀리즘에 응답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미니멀리즘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현대 미술사에서도 도널드 저드나 칼 안드레와 같은 미니멀리즘이 미술사를 지배했던 시기는 길지 않았으며 실제로 저드는 살아생전 자신의 예술이 미니멀아트로 불리는 것에 꽤 불만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