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미O이와
김유보
대단한 일을 할 것처럼 달려온 독일에서 막상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첫째 조카는 축구하느라 늘 집에 없었고 둘째는 독일 친구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했다. 매형은 박사논문 막바지라 이리저리 바빴다. 결국 나는 미O이를 보는 일이 누나를 돕는 유일한 일이었다. 저녁내내 물고 빨고 놀고 미O이를 유치원에 데려갔다가 데려와서는 오후 내내 미O이랑 놀았다. 엄마가 챙겨주는 저녁을 조카들이랑 먹고 미O이를 안고 자는 일이 열흘 동안 독일에서 한 일이었다. 그런 미O이가 아빠랑 같이 나의 멕시코 귀국길을 배웅했다. 통통 거리며 오솔길을 내려갔고 노래를 부르며 목마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누나가 죽자 매형의 태도가 달라졌다누나의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빠를지 몰랐다. 멕시코로 돌아온 지 보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조카들이 걱정되었다. 매형 혼자서 세 명을 살피기는 무리가 있었기에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누나의 유골이 한국으로 운반되어서 시댁 선산에 묻혔다. 그냥 산에 뿌리자는 것을 아버지가 간곡히 부탁해서 그 집안 선산에 묻었다.
그런데 누나의 사망 이후로 매형의 태도가 달라졌다. 우리 집에 전화 한 통 없었다. 우리 입장이지만 남의 집 귀한 딸을 고생만 시키다 타지에서 죽게 만들었다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는 필요했는데 일절 연락을 끊어버렸다. 가끔 손자손녀들이 궁금해서 엄마가 전화를 하면 퉁명스럽게 잘 지낸다고만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피를 토하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박사를 받으면 뭐하냐고 우리 누나만 고생하다가 타지에서 죽어 버렸는데... 차비를 주지 않아서 그렇게 좋아하는 교회도 못 다녔다는데...
나도 다시 개인 사업을 하면서 7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1년에 서너 번씩 한국에 들어가면 엄마랑 둘이서 자리에 누워서 매일 두 시간씩 넘게 독일 이야기를 했다. 지금 누나가 유방암 초기였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한국으로 데리고 와서 수술을 받게 하는 건데... 이미 매형은 재혼을 한 상태였다. 그러다 가끔 애들은 어떻게 지내요?라고 물어보면 큰조카는 축구부 합숙소에서 지내면서 주말이면 우리 집으로 온다고 했다. 매형은 우리 집에 일절 연락을 끊었는데 조카들은 여전히 우리 집을 찾는 것을 보면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듯 보였다. 둘째는 독일에서 잘 지내던 친구집에서 초청을 해서 독일로 가 있다고 했다.
"미O이는?" 엄마도 미O이가 좀 걱정이라고 했다. "친척 집에 보내져서 키워지고 있다는데…"라며 말을 흘리시기에 "내가 데려갈까?" 물었다. "그래, 그러면 좋겠다마는 저쪽에서 보내겠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집에 큰애가 왔다가는 것을 알고는 부산에 못 가게 했다는 사람들인데 오죽하겠나 싶었다. 큰조카는 우리 집에 다녀 가는 것을 비밀이라고 했다. 내가 한 번 연락해 볼까 하다가 잘 지내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한 게 이렇게 천추의 한이 될 줄은 몰랐다.
이 이후로도 나는 엄마에게 두어 번 정도 매형과 연락되면 미O이 물어보시라고 지나가는 듯 말을 남긴 게 전부였다. 작년에 아버지께서 6개월 정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물론 매형은 전화 한 통 없었다. 큰조카만 아버지 장례식장에 참석했다가 돌아갔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형과 누나가 대안학교라도 보내라고 매형에게 권했던 모양인데 나도 할 만큼 했으니 그 자식은 놔두라고 하면서 오히려 화를 냈다는 소리를 들었다. 둘째누나의 죽음도 서러운데 조카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말에 우리 집 식구들은 상당히 마음이 아파있는 상태였다. 특히 큰놈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다들 마음이 많이 쓰이고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큰조카에게 "멕시코로 삼촌이랑 같이 갈래"라고 물었더니 "거기서 뭐해요" 하면서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돌아갔다. 그 때는 몰랐다. 미O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작년 4월 이었으니 미O이는 이미 죽은 채 이불 속에 방치되어 있던 때였다.
거의 실시간으로 카카오톡을 하던 나와 내 동생은 설마가 사실로 확인되자 통화를 했다. 동생이 엉엉 운다. 이 새끼를 이 새끼를.. 하면서 우는 동생의 마음과 내 마음은 똑같았다. 우리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조카들은… 하면서 자책하는 모습에 나도 심히 부끄러웠다. 좀 더 적극적으로 미O이를 찾아보고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서울에서 기껏해야 하루 정도 머무는 출장길이라는 핑계로 미O이를 찾지 않은 나 자신을 심하게 질책했다. 독일에서처럼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고 감정을 억누를수 없었다. 매형은 독일에서도 가끔 첫째를 혼낼 때에는 학교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몇 시간씩 체벌을 했었다. 누나도 말려보고 장모인 엄마까지 말려봐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미O이도 그렇게 대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미O아… 삼촌이 정말 미안해이제 미O이는 다시 엄마 옆에 누웠다. 그 옛날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엄마면 좋았던 그 품으로 돌아갔다. 여기 저기를 통통 거리며 돌아다니다 아무 일 없듯이 엄마 침대 한 편에 누워서 자던 미O이.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말기 암으로 얼굴이 퉁퉁 부은 엄마지만 그냥 따뜻한 엄마 품이 그리웠을 우리 미O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