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용어는 일상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그래서 인간의 패배가 더 슬픈지도 모르겠다.
이준수
인류의 역사가 말해주듯 기술의 진보는 필연이다
"얘야 괜찮니?"
로봇 교사는 아이가 넘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것(?)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달려와 다친 어린이를 부축해주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무사히 치료를 마친 후 학부모에게 자녀의 부상 경위 및 대처 과정을 설명하고 너무 걱정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만하면 꽤 쓸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로봇 교사가 특정 계층의 지식과 가치를 대변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가치지향적이다. 쉽게 말해서 대한민국 교육부와 쿠바의 교육부가 내거는 목표와 지침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국정 교과서 도입 과정을 보더라도 교육내용을 두고 얼마나 많은 이익집단과 관점들이 대립하는지 알 수 있다. 로봇 교사의 지도 내용, 가르치는 방식, 태도를 결정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집단의 억압과 강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둘째, 로봇의 인권을 인정하기 어렵다. 로봇은 생명이 없는 인간의 도구이다. 이마를 짚어주고 자상하게 수학 문제를 가르쳐 주는 정교한 기계에게 학생들은 따스하고 친밀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때로는 불친절한 인간 선생님보다 로봇 선생님을 더 사랑하여 도구 이상의 권리를 부여하려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학생과 로봇 교사 간의 인격 관계 형성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사용자가 희망하면 로봇에게 인간적인 권리를 부여하고 대우해줘야 하는가?
셋째, 로봇의 오류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다. 로봇은 완벽하지 않다. 무인 자동차의 '터널 딜레마'처럼 인공지능 또한 각종 갈등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알파고는 제4국에서 미리 학습되지 않은 유형의 수가 나오자 버그에 가까운 수를 두며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만일 학교 현장에서 기계적 결함으로 사고가 나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교육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며 교사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다른 분야보다 더 엄격한 윤리성이 요구된다.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불확실성이 남아있는 무생물체에게 교육행위를 맡길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