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맛있어 보이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ㅠㅠ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19] '육식인' 청소년이 채소 요리를 하는 이유

등록 2016.03.26 20:09수정 2016.03.2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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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은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굴은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굴은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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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이가 차린 밥상 엄마가 좋아하는 샐러드, 자신이 좋아하는 돈가스와 감자튀김을 만들었다. ⓒ 배지영


"엄마, 혹시 슬럼프에 빠졌어요? 일 끝나고 나면 뭐라도 글을 썼잖아요. 요새는 왜 안 써요?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먹고 싶어도 고기 요리를 못 하겠어요. 엄마가 좋아하는 샐러드랑 나물만 하게 돼요. 엄마, 힘 좀 내요."

제굴은 샐러드 위에 얹기 위해서 리코타 치즈를 만들었다. 우유 적당량에 레몬즙 세 숟가락을 넣고, 소금과 설탕도 각각 한 숟가락씩 넣어서 끓였다. 그걸 흰 면포에 넣어서 물기를 짜내면 리코타 치즈가 된다. 한숨. 제굴은 곧바로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다. 레몬즙을 많이 넣어서 산미가 강하단다. 책에서 본 리코타 치즈하고 모양만 비슷하다고.

3월은 바야흐로 시금치의 계절. 제굴은 <딸에게 주는 레시피>에서 읽은 시금치 샐러드를 만들기로 했다. 시장에서 시금치 2000원 어치를 샀다. 생각보다 많았다. 깨끗하게 씻은 시금치의 절반은 손으로 툭툭 잘랐다. 그 위에 올리브유를 뿌리고, 대저토마토를 썰어 넣고, 파마산 치즈가루를 뿌렸다. 나머지 절반은 데쳐서 시금치나물을 했다.

졸지에 '침울한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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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이가 차린 채소 음식. 고마움의 표시로 완식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ㅠㅠ ⓒ 배지영


엄마라면, 아들이 해 준 요리를 맛있게 먹어야 한다. 보답하는 길은 '완식'뿐이다. 돌이 들어간 샐러드라도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어금니가 없다. 3월 1일부터 그런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꽃차남을 데리고 치과에 갔다. 선생님은 꽃차남한테 진료 의자에 앉으라고 하는 대신, 나를 보고 말했다.


"오늘 컨디션 괜찮으신가요? 계속 미루다가는 잇몸의 염증만 심해져요. 어차피 임플란트 하실 거니까 온 김에 (엑스레이) 사진 찍고 발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이미 나는 위쪽의 양쪽 어금니를 빼고 각각 임플란트 수술을 했다. 나는 원래 육체적인 고통에 둔한 사람. 제굴이를 낳을 때는 밥벌이 다 끝내고 진통이 5분 간격으로 올 때가 돼서야 산부인과로 갔다. 꽃차남은 제왕절개로 낳았는데 수술하고 24시간 지나자마자 활기차게 걸어 다녔다. 그런데 임플란트 수술은 달랐다. 며칠 동안 지속되는 강한 고통. 충격이었다.

진즉에 했어야 할 세 번째 임플란트. 지난해에는 치과 가는 날짜를 잡을 때마다 몸이 이상했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의 영향 때문인지 얼굴이 부었다. 어떤 날은 눈도 제대로 안 떠졌다. 밥벌이만 겨우 할 정도로 몸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발치를 못한 날마다 속으로 '휴우, 살았다'라고 안도했다. 그렇게 1년을 버티다가 오른쪽 아래 어금니를 빼고 말았다. 우발적으로.

이를 뺀 자리는 아픈 게 당연했다. 다음 날부터는 입안 여기저기가 헐었다. 입맛이 싹 달아났다. 갈증 해소 말고는 다른 욕구가 사라졌다. 밥벌이 끝나면 드러눕고만 싶었다. 얼굴도 퉁퉁 부었다. 불과 36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굴이랑 남편이랑 밤늦게까지 '마국텔' 필리버스터를 봤다. 거실 바닥을 뒹굴며 웃었는데. 졸지에 난 침울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샌드위치 못 먹어 대성통곡한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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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도 있다. ⓒ 배지영


제굴은 "엄마, 영화 <아메리칸 셰프>볼 때 먹고 싶었지요?"라면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영화 <스팽글리쉬>에 나왔다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어서는 먹음직스럽게 사진 찍어주라고 졸랐다. 내가 좀 심드렁하니까 제굴은 수다스러웠다. <오므라이스 잼잼> 책에도 나온 유명한 샌드위치라고 지식 자랑을 했다.

"엄마, 파니니 머신 사주세요…. 에이, 근데 사지 마요. 샌드위치 만든다고 기계까지 사는 건 돈 낭비예요. 지난번 샌드위치는 BLT(Bacon, Lettuce, Tomato)였어요. 별명은 '샌드위치계의 왕자'. 보통은 마요네즈를 베이스로 까는데 나는 머스터드를 썼어요. 여기에 킹파뉴(잡곡식빵)를 쓰고, 달걀과 흑맥주를 곁들이잖아요? 그러면 영화 <스팽글리쉬>에 나온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예요." 

나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를 눈앞에 두고서 '세계에서 가장 슬픈 아줌마'를 떠올렸다.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 두 달째 대학 병원에서 누워만 있었다. 움직여서는 안 됐다. 조산 증세에 악성 빈혈, 임신성 당뇨까지 있는 그녀는 과일도 먹어서는 안 됐다. 그때 그녀가 먹고 싶어서 안달을 냈던 음식은 단 하나, 샌드위치였다. 

날마다 도시락을 싸오던 그녀의 남편은 "몰래 먹어" 하면서 샌드위치를 사다줬다. 그녀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식전 당뇨 검사를 하는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견뎠다. 하필 그날,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할 만큼 당뇨 수치가 높았다. 그녀는 24시간 내내 아기가 못 나오게 자궁을 막아주는 주사를 맞았다. 철분제 주사도 함께. 거기에 인슐린 주사까지 맞으면 아기한테 무리가 갈 것 같았다. 그녀는 차마 샌드위치를 먹을 수 없었다. 내 이야기였다.

"엄마, 그때 병원에서 울었죠?"
"엉. (웃음) 샌드위치 못 먹어서 대성통곡했어. 창피하니까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어. 근데 지금은 엄마도 성숙해졌지. 어금니 빼고 입안이 부르터서 네가 해 준 샌드위치도 못 먹잖아. 봐봐. 눈물 한 방울도 안 나지? 멀쩡하다고."

제굴과 나는 동네서점에 갔다. 제굴은 <치즈수첩>을 골랐다. 나는 <오늘 뭐 먹지?>와 <향신료의 세계사>를 억지로 사주었다. 제굴은 학교 갔다 와서 밥상을 차리고, 온라인 게임 '하스스톤'을 보면서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부엌 정리를 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스마트폰과 '합체'해서 지낸다. 닷새 만에 밥을 먹게 된 나는 제굴에게 "책 좀 읽어" 잔소리를 했다. 

"엄마, 힘내요! 밥 많이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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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이가 차린 콩나물밥. ⓒ 배지영


잔소리에 맞서는 방법은 하나. 잔소리가 나오기 전에 행동하면 된다. 제굴은 <오늘 뭐 먹지?>를 읽지도 않았으면서 거기에 나오는 콩나물밥을 했다. 뜨거운 물에 말린 표고버섯을 우렸다. 누리끼리해지면서 은은한 향이 나는 그 물로 쌀을 안쳤다. 쇠고기는 가늘게 채 썰고, 콩나물은 한 번 데쳐서 넣었다. 매운 간장양념과 간장양념, 두 가지를 만들었다.  

꽃차남은 친구 시후(우리 집 위층에 산다)네 집에 가서 내려오지 않고, 남편은 일이 바빠서 집에 못 오는 저녁. 우리 둘만 식탁에 앉았다. 나는 일단 밥상이 '아이돌 오빠'나 되는 것처럼 "꺄아!" 하고 소리부터 질렀다. 입안이 완전히 아물지 않아서 많이 먹지는 못 했다. 나는 제굴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왜 양념장을 두 가지 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물었다.

"간장에 발사믹 식초랑 올리브유를 넣어요."
"아~ 그래?"
"그리고 우유도 좀 넣은 뒤에 파마산 치즈가루를 뿌리면 돼요."

콩나물밥 양념장에 우유는 좀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보고 웃는 제굴의 웃음이 산뜻하지 않았다. 꿍꿍이가 있는 웃음이었다. 그때서야 제굴이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강제굴, (요리 못 한다고) 엄마 무시해?"라고 성질을 냈다. 제굴은 작은 눈이 아주 감기게 웃었다. 

"엄마, 이제 힘 좀 나는가 보네요. 그러니까 밥 많이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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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밥 표고버섯을 우린 물로 쌀을 안쳐서 밥을 지었다고 한다. ⓒ 배지영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 #샐러드 #콩나물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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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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