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여행길의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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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사상 최초의 여성 화가로 알려져 있는 나혜석은 시대를 앞선 여성해방론자이자 문학 작가이기도 했다.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1913년 3월 일본 유학길에 오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도쿄의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유학생 사회에서도 드문 여성화가와 여성문인으로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림도 그림이지만 1918년 <여자계(女子界)>에 발표한 단편 소설 <경희>는 여성의 각성을 촉구하는 당시로선 드문 실천적 작품이다. 귀국 후 3·1운동 시기엔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과 함께 다섯 달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결혼을 약속한 첫사랑이었던 시인 최승구(崔承九, 1892~1917)가 폐병으로 세상을 뜨고 자책하던 나혜석은 1920년 오빠의 소개로 만난 김우영과 결혼하고 이듬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한 남편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다.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국경을 오가던 독립운동가들을 돕기도 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매년 출품하며 특선에 당선되기도 하는 등 화가로서도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녀의 살아생전 영화와 몰락은 파리를 거점으로 했던 구미여행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당시로선 드문 이 세계여행은 6년간의 만주 임기를 무사히 마친 김우영에 대한 일종의 포상휴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흔치 않은 일이다.
칠십 노모에게 갓난쟁이 어린애를 포함한 세 아이를 맡기는 무리한 선택을 감행하면서까지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이 여행의 끝에 기다리고 있을 처참한 날들을 짐작하지 못했다. 1년 8개월의 세계여행, 파리 체류의 경험은 화가로서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새로운 세계와 사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지만 대가는 너무도 컸다.
파리 체류 기간에 만난 최린(崔麟, 1878~1958)과의 짧은 연애와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세기에 남을 이혼 사건으로 나혜석은 파경에 이르고 만다. 결국 차가운 어느 겨울날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 했으니 그녀에게 이 여행은 포상은커녕 독주였던 셈이다. 설령 독주일 것을 알았더라도 그녀는 이 잔을 기꺼이 받아 넘겼을까, 아니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부산의 항구를 떠나는 두려움과 망설임과 설렘이 뒤섞인 그녀의 모습과 1년 8개월 후 부산으로 돌아온, 이전의 그녀가 아닌 전혀 새로운 한 여성의 모습,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푼 꿈이 가득했을 새로운 여성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치울 수 없는 묵직한 바윗덩이 하나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닌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인 그 갑갑함을 견뎌내야 하는 일상이 어떠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