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차려, '궁녀'들아... 세상 참 각박하잖아

'급제자'들과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궁궐' 이야기

등록 2016.03.30 12:26수정 2016.03.30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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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내 처지가 딱 이렇다. 사진은 지난해 8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디지털 과거시험' 당시 모습. 기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지금 내 처지가 딱 이렇다. 사진은 지난해 8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디지털 과거시험' 당시 모습. 기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연합뉴스

이 글은 한 회사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일하는 이의 글입니다. 회사는 '궁궐'로, 계약직 노동자는 '궁녀·궁남'으로 비유했습니다. - 기자말


나는 '궁궐'에서 일한다. 계약 때문에 최대 2년밖에 못 있는 '궁녀'인데도 여기가 내 자리려니, 꿈을 위한 돋움판이려니 애정한다. 궁궐 밖에 있는 사람들은 궁이니 좋다 하고, 나도 일단 안심된다. 역시 궁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좋고 일하는 것도 배워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얼마전 '과거시험'이 있었다. 급제한 사람들은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오랫동안 안정적인 곳에서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 그들은 궁궐의 정식 식구가 됐으며,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과 선후배로서 함께 여생을 보낼 것이다. 부럽고 대단하다.

궁궐들이 그렇듯 문무잡과, 대소과 할 것 없이 업무협조가 필요하다. 궁녀는 급제자 모두가 '선배님'일 수밖에 없는데, 업무 협조시에도 마찬가지다. "선배"라고 부르면 나는 그렇다 쳐도 적응 중인 급제자는 당황한다. "네???" 이런다. 그렇다고 "저기요"라고 할 수 없지 않나….

나보다 늦게 궁궐에 왔지만, 급제에 대한 존중·존경, 뭐 그런 뜻을 내포해 '선배'라고 부른다. 연차가 높은 선배에게 현답을 구해도 해답은 모르겠다고 한다. 궁남녀(?)사이에서도 분분한 호칭 정리인데 다들 딱히 불만은 없어 보인다.

20년 전 궁남이었던 '레전설' 이야기, 지금은?


사실 나는 흔하지 않은 케이스로, 궁녀 2년을 보내다가 다른 곳에 갔다가 다시 이 궁궐로 들어왔다. 오가며 "밥 한 번 먹어야지"라는 사람들도 참 많다. 흔히 농담처럼 자기소개하는 '비정규직 5년 차' 궁녀다. 그러다 보니 궁궐에 대한 이해도나 알고리즘은 당연하게 발전한다.

나도 급제를 준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준비하다 보니 모른 척 해야 할 것이 아주 많았다. 가령 가정환경이라든가, 돈이라든가, 아주 개인적인 것들. 무시할 수 없는 현실들. 난 이 궁궐에서 살아남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떤 급제를 해야 하나 생각한다. 아, 흙수저 이야기까지 넘어가야 하는 걸까.


퇴직을 앞둔 아빠뻘의 모 선배는 20년 전쯤에 궁남이었다고 한다. 가까운 분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특별급제가 가능했다고 해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야기다. 그때는 5년 차, 10년 차 궁남녀가 있었다고 한다. 10년 차 궁남녀가 급제자를 가르치고 상부상조하고 서로를 이해했다고 한다. 꿈에나 나올법한 아틀란티스다.

이제는 모두가 궁남녀와 급제자의 미묘한 동거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기껏해야 2년'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궁남에게 '기껏해야 2년 있었으면서'라고 상처주던 선배도, '기껏해야 2년 있을 건데'라며 책임감 없던 궁녀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잘못은 없다.

딱히 사회적 규제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런걸 만들고 고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 궁금하다. 모든 것을 개인탓으로 돌리기엔 궁궐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열심히들 산다. 우리 궁궐만의 문제는 아니다. 제20대 총선이 3주도 안 남았다. 정신 차리자,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궁궐 #궁녀 #비정규직 #정규직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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