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에서 성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조선군. 식별을 위한 태극 깃발이 보인다.
정왜기공도권
1593년 음력 8월, 이순신의 활약과 명나라군의 개입에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은 강화를 제의했다. 조선과 달리 더 이상 피해를 원하지 않았던 명나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줄 것 등 일본의 비현실적인 요구로 강화가 결렬됐다.
이에 1597년 14만의 일본군이 다시 침입했다. 일본군의 거짓 정보와 아군의 모함에 이순신이 파직당하자 원균이 이끄는 수군은 대패했다. 그러나 복직한 이순신의 함대 13척은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 130여 척을 격파했다.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한 일본 육군은 보급선이 끊겨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보급로가 차단되고 조명연합군의 공세에 밀린 일본군은 한반도 남쪽에 고립됐다.
조선군을 막기 위해 조선인이 쌓은 왜성주둔이 길어질 거라 판단한 왜장들은 수비를 위한 성을 쌓기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왜성,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왜성,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 등 8 개의 왜성을 쌓기 위해 조선 백성들이 강제로 동원됐다. 여러 겹의 벽으로 축조된 왜성을 함락하기 위해 조명연합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을 편성하고 수군이 이를 받치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펼쳤다. 사방에서 순천왜성, 사천왜성, 울산왜성을 동시에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