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나이였을 때 소설이 나를 찾아왔다순천고 3학년에 발표한 소설 <서점풍경>
여백미디어
나는 김승옥 작가를 비롯해 최인호, 황석영, 이청준 등이 청소년 시절에 쓴 글 모음집인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소설이 나를 찾아왔다>를 내보이며 <서점 풍경>이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표지에 실린 작가들 면면을 살펴보더니, 맨 처음에 실린 자신의 소설을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천의 김아무개 사진사가 찍어줬다는 표지 사진을 자신의 휴대전화에 담았다. 그리고서는 소설 제목을 가리키며 멋쩍은 듯,
"처음! 처음!" 미소를 지으며 연신 대답했다. 열아홉에 썼던 글을 일흔이 넘는 지금에서 마주하니 반갑기도 쑥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나요?"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는 대답으로 노트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운다. 연도를 먼저 적고 이후에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나갔는데, 몇몇 사건은 그 날짜까지 기억할 만큼 자세했다. 안경을 고쳐 쓰고 써 내려가는 펜의 움직임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알지 못할 긴장감까지 느껴졌다.
빼곡히 적은 노트를 자세히 보면, '1945년' 뒤에 '8.15 해방', '1948년'에 뒤에는 '여순사건 10월'이라고 적혀있다. 뿐만 아니라 '6.25 전쟁'과 '4.19 혁명' 등 본인이 직접 겪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함께 표시해 놓았다. 그렇다. 김승옥은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동시에 그 시대를 억척스럽게 살아온, 그대로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당시 대학 1학년생이었던 김승옥은 그 뜨거웠던 현장의 한가운데 섰다. 그에게 4.19 혁명은 처절한 경험을 통해 인생을 바꾼 그 자체였다. 그래서 김승옥은 그 날을 '정직한 이들의 날'이라고 불렀고 자연스럽게 글쓰기의 원천이 되었다.
반대로 5.18은 그의 글쓰기에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1980년, 동아일보에 장편 소설 <먼지의 방> 연재를 시작했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군부대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소설 내용이 군 검열에서 몇 줄씩 잘려 나갔음은 물론이고, 젊은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더 이상 할 수 없어 연재 15회 만에 소설을 중단해 버린다.
1960년 스무 살이 되던 해, 김승옥 작가는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한다. 그가 <생명연습>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환상수첩>, <건> 등을 발표한 시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로 '산문시대'가 있었다. '산문시대'는 1962년 6월, 김승옥, 김현, 최하림에 의해서 창간호가 나왔고, 1964년 9월까지 3년에 걸쳐 5호를 내고 없어진 문학 동인지다.
김승옥은 산문집을 통해 '산문시대가 결과적으로 거기에 참가했던 우리 몇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뜻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산문시대의 이야기를 하기가 망설여진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승옥, 서정인, 이청준, 김치수 등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산문시대'는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