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7월 30일 일본 측이 작성한 대한제국무관학교 생도 성적순 명부. 희귀 자료(미공개)로서 책에도 실렸다.
김영숙
이 선생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작가가 숙명인 것처럼 느꼈다. 어떻게 소설가가 됐는지 궁금해졌다. 1947년 인천의 변두리인 서곶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초등학교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에게 인정받아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나가 입상했어요. 닭과 돼지들이 밥을 달라고 소리소리 질러서 아침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시골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썼을 뿐이었는데, 그게 입상했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죠."감성적인 누나들 덕분에 일찍부터 음악의 세계에 빠져든 그는 인천고교 1학년 때 교지에 '오페라 해설'을 실을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그런데 3학년 5월에 급성 류머티스열이라는 진단을 받고 장기 결석했다.
누나와 여자 친구의 도움으로 책을 읽으며 병고와 싸움을 벌였다. 그 후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학년 때 '불연속성의 도정'이란 단편소설로 동국대 학술상 문학부분을 수상하며 이름이 알려졌지만, 뜻하지 않게 군에 입대하고 베트남전에도 참가했다. 그때의 기억과 기록으로 훗날 장편 '훈장과 굴레'를 썼다.
제대 후 신춘문예나 신인공모 등에 응모해 일곱 번이나 최종심사에 올랐지만 매번 고배를 마시고 펜을 꺾었다. 그 후 7년간 대건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명(耳鳴)이 심해져 이비인후과에 갔고, 회복의 기미가 없자 정신과를 찾았다.
"소설을 까맣게 잊고 애들만 가르쳤어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1등을 뺏긴 적이 없었죠. 그러다 서른다섯이 됐는데 갑자기 텅 빈 느낌이 들더라고요. 3년간 고3 담임을 했는데도 내가 껍데기 같았죠."이 선생의 솔직한 고백을 들은 정신과 의사는 '다시 소설을 쓸 것'을 처방했다. 그가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데는 동국대 국문과 선후배들의 애정과 노력이 있었다. 이미 문단에 명성이 난 작가들이 그와 함께 스터디그룹을 만든 것이다.
그는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고, 2년 뒤인 1986년 2월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훈장과 굴레'가 당선됐다. 1988년 11월에는 '침묵의 섬'으로 대한민국문학상 소설부분 신인상을 수상했고, 1990년에는 '황해'로 박영준 문학상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 감성은 떨어지지만 통찰은 깊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