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 전날 찾아온 방송국, '지지리도 없는 운'

[류외향의 자연주의 음식과 삶의 이야기 18]

등록 2016.06.21 11:52수정 2016.06.2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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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금 1억에서 4천으로 추락, 그렇게 아까울 수 없었다


가게는 쉬 나가지 않았다. 택지개발지구의 거품이 서서히 빠지는 중이었다. 우후죽순 들어선 원룸은 빈 집이 많았고, 대박의 꿈을 안고 먹는 장사를 시작한 수많은 상가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세 들어 있던 건물 2층에는 유명 프랜차이즈 식당이 들어섰다가 우리보다 더 빨리 손 털고 나갔을 정도다. 그래도 그 상가는 유명 프랜차이즈라는 또 다른 거품 때문에 손쉽게 인수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다른 희생양인 그 인수자가 안 됐다기보다 권리금 두둑하게 얹어 받고 나간 전 세입자가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거기에 반해 우리 가게는 임대료도 높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 아가씨가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한 권리금 때문에 입질조차 받지 못했다. 그 아가씨는 너무나 당연한 듯이 1억을 불렀다. 그 자리는 그렇게 받아야 한다며 자기를 믿고 기다려보라고 큰소리를 쳤다.

우리는 '1억'이라는 숫자에 혹해서 정말 그 자리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미련한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 나타났다. 그러나 부동산 아가씨는 며칠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와 인수자의 의사를 전달하더니, 결국 비싼 권리금 때문에 성사가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협상을 벌이고 싶었으나, 부동산 아가씨는 시종일관 1억을 꼭 받게 해주겠다면서 다른 인수자를 기다리자고 우리를 응원했다. 그래, 우리는 정말 '응원'이라고 생각했다. 인근에 포진해 있는 다른 많은 부동산에도 가게를 내놓았지만, 그들은 임대료와 권리금을 듣는 순간, 고개부터 흔들었고, 역시나 단 한 통의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부동산 아가씨가 역시나 수완이 좋은가 보다 하고 믿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두어 달이 그냥 지나갔다. 우리는 점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먼저 전화를 걸어 권리금을 내리자고 제안했다.

부동산 아가씨는 사모님이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다면서 조금만 내려 보자고 했다. 그리곤 처음 나타났던 그 사람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계속 확답이 없다고만 했다.

그러더니 우리와 같은 건물에 사무실을 쓰고 있는, 건물주와 협력관계인 부동산 아줌마가 나를 불렀다. 권리금 4천에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1억에서 4천까지 떨어진 권리금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고사했다. 이쪽 부동산 아가씨가 더 나은 권리금으로 연락해주길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은 계속 흘렀고, 이쪽 부동산 아가씨가 4천에 넘기는 수밖에 없겠다고 했다. 그 다른 부동산 고객이 알고 보니, 자신의 고객과 동일인물이라는 얘기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쪽 부동산 아가씨와 함께 분노했다.

그러나 공은 다른 쪽 부동산으로 이미 넘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더 기다리다간 임대기간을 넘겨서 한 푼도 못 챙기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다.  

땅 가까이 살라는 어떤 분의 가르침, 제주로 마음 기울어

인수자는 핸드폰 매장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사업가였다.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많이 팔지 못해도 다른 매장 수입으로 충분히 임대료를 낼 만큼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 가게 자리를 넘겨받기 위해 4개월이 넘도록 작전을 펼친 모양이었다. 여유 있는 자의 '밀당' 앞에서 우리는 보기 좋게 KO패 당한 것이었다.

그때쯤에는 '4천도 어디냐!'면서 거기서도 또 깎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되었다. 나중에는 우리와 함께 분노했던 이쪽 부동산 아가씨도 한 패였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나, 확인할 길은 없었다. 칼자루 쥔 자들 앞에서 영원한 약자가 되어야 하는 가난한 세입자는 그렇게 또 바보가 된 채 무력하게 권리금 계약서를 작성하고 이사 날짜를 잡았다.

가게를 내 놓고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할지 결정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첫째 후보지는 평택이었다. 생활협동조합 매장이 있는 주택가 골목 아담한 가게를 물색하러 다녔다. 생협이 들어선 곳이라면 그 동네 사람들의 음식문화가 자연주의에 조금이라도 가깝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식의 특성상 주방이 커야 하는 것이 큰 단점으로 작용했다. 임대 나온 상가 가게는 모두 아담한데 주방자리가 마땅치가 않았다.

둘째 후보지는 서울 또는 서울 근교였다. 특히 분당에서 일 삼아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분당을 염두에 많이 두었다. 그러나 대도시의 번잡함이 싫어서 평택으로 내려온 것이었는데, 다시 올라가자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평택에서는 공기 좋은 곳에 내 아파트라도 있지만, 서울 가까이 가자면 또 다시 세입자로 전락해야 했고, 남편이나 나나 대도시에서 부대끼고 산다는 것이 영 마뜩찮았다. 또한 가게 임대료, 인테리어 비용 등등 자본금이 평택보다 더 들었으면 들었지 적지는 않을 것이었다. 큰 빚을 청산하는 게 급선무여서 북쪽행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셋째 후보지는 제주였다. 2012년에 한미FTA가 발효되었다. 나는 그 전해부터 GMO(유전자조작생물체)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접하기 시작했고, 한미FTA가 GMO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이런 저런 책을 읽고, SNS를 하면서 언젠가 식량대란이 닥칠 것이라고 예감했다.

당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땅 가까이 살아야 해."

이 말은 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다못해 칡뿌리라도 캐먹으려면 시골로 가야 했다. 시골 중에서도 식당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주뿐이었다. 나는 남편과 짜장면을 팔면서 땅을 알아보고, 당분간은 텃밭이라도 조금씩 농사를 지어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제주행은 급물살을 타며 진행되었다. 마라도에서 오래 살았던 남편은 제주로 다시 간다니, 더없이 좋아했고, 나 역시 남편이 잘 아는 제주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땅과 집을 알아보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그때부터 제주의 땅값, 집값이 많이 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잘 찾아보면 우리가 가진 돈으로 제주 옛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소설 쓰는 조헌용이 일찌감치 사둔 집이 비어 있어 우리에게 가게와 집을 구할 동안 들어가 살라고 배려해주었다. 이제 평택에서 가게를 마무리하고 이사 계획을 세우는 일만 남아 있었다.

가족은 아니고 친구도 아니며 회사 동료도 아닌 일행의 방문

그렇게 몇 달을 긴장감 속에서 보내고 나니, 어느새 폐업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손님이 뜸할 시간에 일행 세 명이 들어왔다. 나는 통창 밖으로 승용차가 설 때부터 지켜보았는데, 차에서 내리는 모습에서부터 세 사람의 관계가 좀 특별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인 캐주얼 복장 남자와 40대 중반 이후인 정장 차림 여자와 50대 중반인 양복을 입은 남자가 일행이었다. 가족은 아니며, 친구도 아니고, 회사 동료도 아니었다. 한 차에서 내리는데 서로서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퍼스트 레이디의 손짓을 하며 가게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들 세 남녀가 무슨 관계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비즈니스를 위한 만남이라면 룸이 없는 우리 가게는 어울리지 않았고, 특히나 혼자 캐주얼 복장인 젊은 남자가 생뚱맞았다. 그렇게 주의를 끌며 나타난 세 사람은 짜장면, 짬뽕, 탕수육에 요리 한 가지를 더 시켰다. 요리는 유산슬이거나 팔보채였던 것 같다.

음식이 나가자, 40대 여자가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몹시 우아하게 질문을 했다. 그때만 해도 음식 사진을 찍으면서 양해를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요즘에야 유럽 같은 데서 지적재산권 운운하며 음식 사진 찍는 것을 금지하는 식당이 있다는 얘기가 알려지면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허락을 구하는데, 그때는 손님이나 식당 주인이나 대부분 개의치 않았다.

서양 요리처럼 플레이팅 기술이 중요시 되는 음식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만, 사진을 찍는다고 레시피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레시피를 안다고 누구나 따라할 수도 없는 음식이니, 그저 많은 사진들이 노출되어 홍보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우아하게 양해를 구했는데, 그 우아함이 나를 상대한다기보다 그들 일행 사이에서 지켜야 할 격식 같은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들은 사진 찍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리고는 음식을 개인 접시에 덜어서 한 젓가락씩 천천히 씹어 넘기며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비로소 나는 그들이 방송국에서 나왔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나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면이 특이하다,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조미료 맛이 안 느껴진다, 어떻게 이렇게 맛을 낼 수 있냐 등등 몹시 구체적이고 세심했다. 일반 손님이 할 수 있는 질문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그리곤 내가 열심히 대답을 하자, "식재료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시나 봐요"라며 감탄을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간장 때문에 정장 차림의 두 남녀가 전문가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우리 가게는 탕수육이든 요리든 간장을 따로 내어주지 않는다. 음식 자체에 간이 다 되어 있으며, 우리가 쓰는 간장은 천연발효 간장이라서 별 맛이 없다. 찍어 먹어서 맛이 있으려면 조미료가 첨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날 간장을 따로 요청해서 내어준 것이 하필 회를 팔 때 '특별히' 사용하는 일본산 조미 간장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화학첨가물로 만든 와사비조차 먹지 않지만, 그때는 회를 팔자니 와사비와 조미 간장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간장 종지를 내어주자 양복 입은 50대 남자가 젓가락으로 간장만 찍어서 맛을 보더니, "어? 조미료 맛이 나는데?"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확실히 전문가였고, 간장을 달라고 한 것도 의도적인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들이 조미료 맛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보고, 먹거리X파일 팀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 방송을 본 적은 없었으나, 많은 손님들이 방송 얘기를 해주었고, 우리 가게를 제보했다는 단골도 여럿이었다. 나는 방송국에서 온 거 아니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몹시 부자연스럽게 부인했다.

그러나 이미 나나 그들이나 속으론 서로 다 안다는 심정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간장을 다시 갖다 주었다. 원래는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천연발효 간장을 쓰고 있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제야 그들 역시 확신이 들었는지 춘장에 대해서도 캐물었고, 장사가 어떠냐며 떠보았다.

우리는 친절하게 춘장 상자를 꺼내 와서 성분표시를 보여주며, 댁들이 찾는 바로 그, 조미료도 없고, 캐러멜색소도 없는 춘장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장사가 안 돼서 바로 다음 주면 문을 닫고 제주로 떠난다는 사실까지 일러주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화들짝 놀랐다.

우리는 어느새 조금은 친근해져서 왜 장사가 안 되었는지, 제주 가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그들은 문 닫기 전에 한 번 더 먹으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우리는 폐업을 앞둔 터라 방송이 성사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운도 지지리도 없네,라는 탄식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카메라를 앞세운 방송팀이 쳐들어왔다. 한 번은 더 온다더니, 그게 그 말인 모양이었다. 폐업을 딱 하루 앞둔 9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평택이 아니라 제주도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 #자연주의식당 #착한식당 #먹거리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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