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회] 자작시를 모아 보니 '연결고리'가 보인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68회]

등록 2016.07.01 11:48수정 2016.07.0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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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아침 햇살이 창호를 비치자 관조운은 벌떡 일어났다. 산중의 햇살은 봉우리를 힘들게 넘어오느라 많이 사나워졌다. 환한 창을 뚫고 비치는 햇살이 제법 따갑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로 인해 늦잠을 잔 모양이다. 자운헌에서 사흘 째 아침을 맞고 있다. 객실에서 나와 별채를 바라보니 누군가의 모습이 창에 어렸다. 서실에 가니 혁련지가 사부 모충연의 시문집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사매, 일찍 일어났군."

관조운이 기척을 했다.

"네, 사형, 새벽에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이곳으로 달려왔어요."

혁련지가 생각에서 벗어나 대답한다.

"무슨 이유라도?"
"사형, 사부님이 전하시고 싶은 내용이 자작시(自作詩)에 담겨 있었어요."
"그래?"
"우리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거죠. 사부님의 시를 보세요."


관조운이 문집을 펼쳐 둘째 면에 있는 시를 보았다. 스승 모충연의 자작시다.

검에 어린 수심                             검수(劍愁)


시름에 겨워 검을 휘두르니                 揮劍忘愁心(휘검망수심)
시름은 오히려 검망 속에 갇혔구나          猶愁囚劍網(유수수검망)
검일랑 검집에 넣어두고                    劍也納劍匣(검야납검갑)
책이나 펼쳐볼거나                         讀經只書展(독경지서전)

다음 쪽을 넘기니 두목의 시가 적혀 있고, 그 뒤로 한유, 왕유, 맹교의 시가 있다. 다시 몇 쪽을 넘기자 혁련지가 멈추라는 손짓을 했다. 자작시가 적혀 있는 쪽이다.

<허산선사를 그리며>                                      憶虛山(억허산)

청운의 뜻은 변함이 없는데 세월은 인정을 하지 않네      靑意不變歲不認(청의불변세불인)
평생 공부 어디 가고 한가로이 지내시나                  一生修奚閑歷日(일생수해한력일)
진인과 선사가 한마음으로 깨우치니                      眞人禪師覺一心(진인선사각일심)
도가와 불가가 둘이 아니오 내외에 구별이 없도다         不二道佛無內外(불이도불무내외)

"사형은 허산스님을 아세요?"

혁련지가 물었다.

"사부님과 교우가 깊으신 소림의 대사라고 얼핏 들은 적이 있어. 자세히는 몰라."
"허산스님은 무승(武僧)이 아니라 선승(禪僧)이에요."
"소림은 무승이 곧 선승 아닌가?"
"크게 보면 소림의 무(武)라는 게 선(禪)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편이지만, 실제로는 무승은 무예만 수련하고 선승은 간화선만 참구해요."
"그렇다면 선승인 허산스님은 왜 소림에 있지?"

"그게 사연이 있어요. 허산스님은 애초엔 소림의 무승으로 출발했어요. 아주 뛰어난 자질로 제자 중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선객을 만나 크게 깨우치고는 무를 버리셨답니다. 그후 소림본원을 나와 숭산 칠십이봉 중의 어느 곳에 토굴을 짓고 생활하고 있는데 그곳을 묘적암이라고 한다는 걸 제가 스승님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다시 몇 쪽을 넘기는데 "이 시 제목을 보세요" 하고 혁련지가 불쑥 말했다. 관조운이 차분하게 읽어보았다.

<이제를 생각하며>                                         思二弟(사이제)

너의 재주가 세상과 어긋났구나                          世艮汝之才(세간여지재)
허허로운 꿈일랑 산중에 묻고                            虛夢山中埋(허몽산중매)
스승의 참뜻은 네가 간직하리니                          師眞意爾藏(사진의이장)
그날에 이르면 어찌 너를 이인(異人)이라 하리오.          異人後到豈(이인후도개)

"둘째 사숙님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관조운이 혁련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요. 둘째 사숙 운몽선객을 말씀하시는 게 틀림없어요."

시문집 전체 육십사수 중 스승 모충연의 자작시는 여덟편이었는데 그중 혁련지가 주목한 시는 위의 두 수 외에 한 수가 더 있었다.

<족자와 부채>                                             簇煽(족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점                            碧空一片雲(벽공일편운)
꿈속에서 본 구름과 똑 같구나                              夢見於同雲(몽견어동운)
본시 구름에 정해진 형상(모양)이 있으랴                     素雲定形焉(소운정형언)
화폭에 그리나 부채에 그리나 구름이면 다 같은 것을          同雲描幅煽(동운묘폭선)

"어때요?"

혁련지가 뭔가를 알아챘느냐는 식으로 물었다. 생각의 물꼬란 이상했다. 관조운은 어제만 해도 사운첩을 살펴보며 이리저리 궁리하고 요조조모 따져 보아도 떠오르지 않던 생각이 갑자기 둑이 터지듯 쏟아졌다.

"이건 둘째 사숙님이 숭산의 허산선사에게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혁련지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들을 이어놓고 보니 상관관계가 드러나는군. 특히 '이제를 생각하며'에서 2구 '허허로운 꿈일랑 산중에 묻고'라는 의미는 허산선사를 암시하고, 3구에서 '스승의 참뜻을 간직'한다는 건 곧 허산선사나 둘째 사숙님에게 이 모든 비밀의 단서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어."

"제 생각도 그래요, 여기에 시 '족자와 부채'를 더 이어보세요. 진인의 네 가지 유품 중 첫째와 둘째에게 하사한 그림과 부채가 바로 묘적암에 있다는 걸 사부님께서 암시한 거예요."
"음, 맞아. 틀림없어. 그럼 이제 어떡하지?"

관조운이 물었다.

"어떡하긴요? 사숙 어른께 말씀드리고 숭산으로 가야죠."
"담 사숙어른은 묘적암을 알고 계실까?"
"설령 모르신다할지라도 묘적암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진 않을 거예요. 소림사의 스님들에게 물어보면 되니까요."

혁련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관조운은 자운헌 본당으로 급히 갔다.

"사숙어른께서는 허산선사를 알고 계셨습니까?"
"소림의 스님이지, 아마?"

담곤이 확실치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관조운이 사운첩에 있는 자작시의 수수께끼를 설명했다.

"사질들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럴 법 하구먼. 대사형께서 사문을 나오고 난 이후 소림의 선사와 깊은 교류가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긴 한데, 내가 직접 만나 본 적은 없단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담곤의 반응이었다. 이어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사형께서 굳이 문집을 어렵게 감춰 놓고 거기에 암호 같은 시를 적어놓을 이유가 있었을까?"
"아마, 사부님께서는 태사조 어른의 유지를 저버릴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 후일을 기약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숙어른."

혁련지가 한마디 거들었다.

"…."

담곤은 혁련지의 설명에 대꾸할 기색도 없이 생각에 잠겼다. 대사형 모충연이 둘째 사형 기승모의 부채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그리고 사형 자신이 둘째의 부채를 책임지고자 했으면 왜 넷째인 자신에게 맡기지 않고 제삼자 격인 허산선사 쪽으로 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몰이해의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일말의 서운함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사부님께선 사숙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을 방법을 찾다가 그 방법을 택하신 것 같습니다. 네 가지 유품이 한데 모여 있으면 애초 진인께서 의도한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다고 광인이 되신 셋째 사숙님의 부채를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도 없고, 누군가는 보관을 해야 할 텐데 사부님이 두 개를 다 보관하고 있자니 다른 사제분들에게 오해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고 해서, 아예 믿을만한 삼자에게 당신의 그림과 둘째 사숙님의 부채를 함께 맡기신 게 아닐까요."

혁련지가 담곤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좋아, 그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네."

담곤이 말끔하게 태도를 바꾸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숭산 소림사 묘적암으로 한시라도 빨리 가야하겠구먼."
"사숙어른께서는 숭산의 묘적암을 아십니까?"

관조운이 물었다.

"아니, 자세히는 모르지만 숭산의 칠십이봉 어디쯤에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네."
"일단 출발부터 서두르죠. 여기 산장이 하루 이틀 쯤은 괜찮을지 몰라도 은화사나 금의위에 노출되는 건 시간문제지 싶습니다."

혁련지가 말했다.

"아, 서실에 있는 검을 노부에게 갖다 주게."

담곤이 불현듯 생각난 듯 관조운을 향해 말했다. 관조운이 별채 서실의 벽에 있는 검을 떼 왔다.

"자네들이 이 검을 가져가게나. 대사형이 둘째 사형과 여기 머물 때 지니고 왔던 것인데, 사형이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검만 남은 거지, 언젠가는 사형께 돌려줘야지 하다가 세월이 흘러버렸고 사형이 또 그렇게 가셨으니, 사형의 유품인 이 검을 간직할 사람은 자네들 밖에 없네 그려."

담곤이 스승님의 유품이라고 말하며 건네자 관조운이 공손히 검을 받았다. 검을 살피니 손잡이에 '심운(尋雲)'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밖에 장식 하나 없이 수수한 모양새다. 사부님의 품성이 그대로 배어든 느낌이다.

"사숙어른, 소제보다는 혁련 사매가 검에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무예나 검법에서는 혁련지가 한 수 위니 그녀가 지니고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다. 담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관조운은 혁련지에게 검을 건넸다. 관조운은 퉁소와 자기 문병(文甁)을 보로 싼 다음 바랑 속에 넣고 떠날 채비를 했다.
덧붙이는 글 월, 수, 금요일 주 3회 연재합니다.
#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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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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