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1일, 아직 콜트콜텍엔 4명의 해고노동자가 있다

[안건모가 만난 사람들] 그들은 '꿈의 공장'에 남았다

등록 2016.07.03 20:13수정 2016.07.04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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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콜트'와 '콜텍' 노동자들이 전국 주요지역을 돌며 연대 투쟁할 때 들었던 현수막 ⓒ 금속노조


콜트악기는 인천에서 전자 기타를 생산하고 콜텍악기는 대전에서 통기타를 생산하는, 같은 업체였다. 모두 'Cort'(콜트)라는 브랜드로 통한다. 1973년 성수동에서 자본금 2백만 원으로 사업을 개시한 이래 인천과 대전 공장, 인도네시아, 중국 등 6개 법인으로 확장, 세계 악기 시장 점유율 30%였던 회사다. 2007년 노동자들을 해고할 당시 대표이사 박영호는 한국 부자 순위 120위, 확인된 재산만 1191억 원이었다.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는 까닭은 노동자들을 쥐어짠 덕분이었다. "자꾸 창문을 쳐다보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창문 하나 없었던 공장에서 군소리 없이 기계같이 일하던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악취가 나는 마스크 하나를 일주일 동안 써야 했고, 일주일에 한 켤레 나오는 목장갑도 빨아서 다시 써야 했고, 조기 출근은 기본이고 물량이 나오지 않으면 무급으로 잔업을 강제로 해야만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더 열악했다. 생리휴가와 월차휴가도 쓰지 못했다. 관리자들은 화장실 자주 간다고 동료 직원들 앞에서 망신을 주기도 했다. 아침에 출근하는 여성 노동자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오늘은 화장이 잘 먹었네?" 하고 성희롱을 하기도 했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회사를 같이 다니던 남편이 은행에서 만난 관리자한테 인사 안 했다고, 그 관리자한테 괴롭힘을 당해서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썼다(그 여성 노동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산업재해 폐해도 심각했다. 사포로 문지르는 연마반은 손목이 성한 사람이 없었다. 2007년 노동부와 검찰 합동 사업장조사에서 콜트악기는 27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항이 적발되기도 했다. 그런 회사는 퇴직금 한 달 분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1년 되기 전 강제로 퇴직서를 강요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렇게 만든 콜트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기타였다. 펜더, 깁슨, 아이바네즈 같은 세계적 명품브랜드를 OEM 방식으로 제작해 온 회사였다. 그런데 박영호 사장은 더 싼 임금으로 기타를 생산하려고 중국,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차리고 한국 공장을 하루아침에 폐업해 버렸다. 하지만 명품을 만들던 노동자들을 내쫓고 명품을 생산할 수 있을까? 억울한 노동자들이 그렇게 쉽게 물러날까? 이제 서서히 콜트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있다. 박영호 사장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노동자들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는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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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31일 화요문화제에서 공연하는 콜밴 ⓒ 안건모


설마 그럴 줄 몰랐겠지. 박영호 처지에서 보면 참 억울할 거다. 기타 공장을 만들어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얻었는데 말이다. 박영호는 물론 공장을 완전히 폐업한 건 아니다. 세계 음악가들이 한국 브랜드를 선호하니까 언젠가는 다시 한국 공장을 돌려야지, 그깟 노동자들이 농성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얼마나 버티겠나? 농성을 접으면 공장을 돌려야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벌써 10년이라니 참 지독하다. "노동자들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고 할 만도 하다. 박영호 자신 때문에 인생 조진 노동자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콜트콜텍 폐업 과정을 간단히 돌아보자. 먼저 2007년 3월 12일에 인천 콜트에서 일하던 전체 생산직 노동자 160명 중에서 56명을 집단 정리해고한다. 노동자들은 농성에 들어갔고, 그해 12월 11일엔 천막농성을 314일 동안 하던 이동호 조합원이 분신자살을 시도해 중상을 입었다. 첫 번째 반발. 회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2008년 8월엔 아예 공장을 폐업해 버린다. 대전 콜텍도 2007년 4월 9일 휴업 통보와 함께 공장을 폐쇄한다. 그리고 7월 10일자로 생산직 노동자 89명을 정리해고하면서 폐업 선언을 한다. 그런데 순순히 물러설 줄 알았던 노동자들의 투쟁이 끈질기게 이어진다.  

콜텍 이인근 지회장은 2008년 10월 14일 한강 망원지구 15만 4천kW 송전탑에 올라 한 달 가까이 고공 농성을 하면서 20일 동안 단식농성을 했다. 11월 25일 새벽에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본사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다섯 시간 만에 경찰특공대가 투입해 해산을 당했다.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은 2009년 5월에 본사 점거농성을 벌인 조합원 18명 모두를 기소했고, 서울 남부지방법원은 18명 모두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0월을 선고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법에 호소했다. 2009년에 콜트콜텍의 노동자 해고가 불법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박영호 사장은 단 한 번도 정식 교섭조차 응하지 않았고, 항소했다. 2012년에는 콜트와 콜텍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엇갈렸다. 같은 회사인데 콜트의 노동자 해고는 부당하고 콜텍의 해고는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주간경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2012년 최악의 판결로 선정되는 판결이었다.

2013년 2월 1일엔 행정대집행(이라 쓰고 용역깡패 투입 철거라고 한다)으로 경찰과 용역깡패가 콜트악기 공장에 있던 농성장을 철거했다. 농성장을 지키려고 했던 이인근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임재춘 조합원은 이빨이 부러졌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해외 원정투쟁을 나섰다. 제품의 95%를 세계시장에 팔고 있는 콜트 악기 사업주의 횡포를 알리고 회사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2009년 3월, 세계 3대 음악전시회 중 하나인 독일 뮤직 메세를 비롯해 2011년 1월 미국 남쇼까지 모두 여섯 번의 원정 투쟁을 다녀왔다. 원정 투쟁단은 꽤 많은 성과를 올렸다. 세계의 음악가들 자신들이 쓰고 있는 펜더, 깁슨, 아이바네즈의 기타들이 사실은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OEM 방식으로 만든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음악가들도 연대의 뜻을 밝힌다.

후지 락페스티벌의 초청으로 방문한 일본에서는 세계적인 유명 가수 잭 드라 로차가 공연 중간 자신의 무대에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세워 주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국제네트워크가 조직됐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밴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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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꿈의 공장>의 한 장면. ⓒ 김성균


농성이 길어지면서 생계가 막막해진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투쟁 현장을 떠났다. 남은 사람은 대여섯 명. 포기할 수 없었다. 그즈음 김성균 감독이 콜트콜텍 노동자들 이야기를 <꿈의 공장>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 상영회를 연다. 상영회가 끝나고 '킹스턴 루디스카'   밴드의 축하 공연이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그 밴드 매니저가 콜트콜텍 노동자들에게 제안했다.

"5년 동안 뭐했냐? 투쟁 시작하면서 악기라도 하나 배워서 음악으로 대중을 만났더라면 쉽게 투쟁 상황을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그 말을 듣고 밴드를 만들기로 했다. 밴드 이름은 '콜밴'.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밴드'의 준말이다. 문화연대와 함께 소셜 펀딩을 해서 악기를 샀다. 보컬과 기타, 베이스, 카혼.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골랐다. 콜밴 결성 한 달도 안 된 2011년 12월에 홍대 앞에 있는 클럽 <빵>에서 첫 공연을 했다. 연영석 노래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할 줄 아냐>라는 노래를 불렀다. 기교도 없이 4분의 4박자를 치는데 그 박자마저 틀리고 음도 어긋났다. 누가 그걸 탓하랴. 관객들은 환호했다. 그 뒤부터 콜밴은 농성장 단골 밴드로 '활약'했고 콜트 불매운동 유랑문화제를 다니기도 했다.

콜밴은 음악을 비롯한 여러 분야 문화예술인들의 연대도 이끌어냈다. '노 뮤직, 노 라이프(No Music, No Life)'라는 기치 아래 국내외 뮤지션들은 콜트 기타 불매 운동을 펼치며 꾸준한 지지를 표했고, 기타리스트 신대철 씨는 <기타 레전드, 기타 노동자를 만나다>라는 콘서트에 참여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콜밴은 지금도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빵'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콜밴은 지리한 농성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서초동 점집

2014년 1월 10일, 콜트콜텍의 해고 노동자 24명이 콜텍을 상대로 낸 해고무효확인소송의 파기 환송심에서 노동자들이 패소했다.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경영상의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콜밴 노동자들은 자작곡 '서초동 점집'에서 그 판결을 비꼬았다.

"열네 명의 검은 망또 점쟁이가 요상하게 점을 치네. 미래의 경영까지 점을 치는 신 내린 무당인가? 미래의 경영까지 점을 치는 신 내린 개떡 같은 법원이다."

힘없는 노동자들을 짓밟는 건 법원뿐만이 아니었다. 수구언론은 기막힌 거짓말로 노동자들을 짓밟는다. 동아일보는 2008년 <7년 파업의 눈물>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노동조합의 강경 투쟁 때문에 콜트악기 부평공장이 문을 닫게 됐다고 보도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너무 억울해 동아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2011년 9월 19일에 "콜트악기의 폐업이 순전히 노동조합의 잦은 파업 때문이라는 내용으로 보도한 이 사건 기사는 허위"라고 판시했다.

결국 동아일보는 2015년 10월 1일 '쪽팔리게' 정정 보도를 싣는다. <한국경제신문>도 허위 보도를 했다가 망신을 당한다. 결국 2015년 10월 1일 "콜트악기가 한국 공장을 폐쇄한 이유는 노동조합의 생산 활동 중단과 폭력시위 등으로 경영자를 압박하여 경영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고 정정 보도를 싣는다.

그런데 새누리당 김무성은 한술 더 뜬다. 2015년 9월 3일 "콜트악기·콜텍, 발레오공조코리아 등은 이익을 많이 내던 회사인데 강경 노조 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주장했다. 정부·여당이 노동악법을 밀어붙이려고 억지 사례를 갖다 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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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콜트-콜텍발언'과 관련, 금속노조대전충북지부와 민주노총대전본부, 금속노조 콜택지회가 2015년 9월 8일 새누리당대전시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 대표의 사과를 촉구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분노가 치밀었다. 콜트 방종운은 9월 4일부터 한 달 정도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3주 넘게 1인시위를 했다. 새누리당과 김무성은 철저하게 무시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여의도 새누리당 앞에서 노숙 농성장을 차리고 방종운은 45일 동안 단식 투쟁을 했다. 방종운이 병원으로 실려 가고 그 뒤를 이어 콜텍 이인근도 13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릴레이 단식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제 농성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노동자는 네 명이다. 이들은 2016년 6월 20일 현재 3429일 넘게 투쟁하고 있고 259일째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김경봉, 방종운, 이인근, 임재춘, 이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을까. 그이들의 삶을 되돌아보자.

1. 김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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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가이버라는 별명을 가진 김경봉. 옷걸이를 잘라 모기장 고리를 만들고 있다. ⓒ 안건모


콜텍 해고자 김경봉.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얼굴,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김경봉은 1959년에 대전 자양동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셋째인데 남자로는 맏이다.

김경봉은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구김살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 아버지는 현장 노동일을 했다. 십장으로 일해서 그렇게 어렵게 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복막염으로 큰 수술을 받으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누나들은 공장을 나가고 없고, 동생들은 먹을 게 없어서 누워 있었다. 김경봉은 퇴근길에 아버지가 받아온 새참 빵을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그게 아버지 밥이었는데."

김경봉은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봉천동에서 냉동기를 만들고 모터를 수리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냉동기 기사를 따라 다니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러다 1979년에 군에 입대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니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신발 공장을 들어갔다. 거기서 평생 반려자를 만났다.

"첫 출근날 통근버스를 타고 앉아 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버스를 타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했지만 제 눈에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이뻐 보였다. 원래 통통하고 복스럽게 생긴 사람을 좋아한다. 지금은 많이 말랐다. 금방 쓰러지게 생겼다. 나 때문이다."

김경봉은 대전피혁 공장에서 7년, 동성피혁에서 7년 동안 일을 했다. 회사가 부도가 난 뒤에는 건축 현장에서 2년 동안 일을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애들이 크니까 규칙적인 수입이 필요하다고, 기타 만드는 콜텍이라는 공장에서 사람을 모집하는데 한번 들어가 보라고 했다. 김경봉이 그 말을 듣고 콜텍에 입사원서를 냈다. 그때 벌써 나이가 마흔한 살이었다.

김경봉은 처음부터 기계반에서 일했다. 기타 바디와 상목, 넥크, 헤드 등 기타 재료는 다 만들었다. 전기톱으로 몸체를 자르는 간단한 공정을 하다가 이틀 뒤에 바로 넥크 만드는 공정에서 일했다. 기타 생산은 끝이 없었다. 자동 기계가 도입됐는데도 수요를 못 따랐다. 김경봉은 일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 자동 기계를 개조하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회사 살찌우는 일만 했다. 그때는 좋은 기타를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만든 기타인지 헤드부터 쳐다보게 된다."

김경봉은 콜텍 공장에서 일할 때 굴뚝 청소하던 날이 가장 기억난다고 했다. 회사가 비용을 줄이려고 굴뚝 청소를 외부업체에 맡기지 않고 공장 노동자들에게 특근으로 맡겼다. 일하다가 점심시간에 중국 음식을 시켰다. 그런데 짬뽕시킨 사람한테는 500원을 따로 내라고 했다. 짜장면보다 500원이 비싸다고.

김경봉은 입사 7년 만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건, 명백한 부당노동행위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회사가 이익을 내고 있지 않았는가. 김경봉은 공장으로 바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고 농성에 참가했다. 그게 10년이 걸릴 줄 꿈에도 몰랐다.

그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후회 안 한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투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겠지만 현재 투쟁이 지지부진하니 그런 생각이 든다."

김경봉의 큰딸은 벌써 서른두 살이 됐다. 그 아이는 대학 2학년 때 휴학을 했다. 스물아홉 살 먹은 둘째가 또 대학 입학을 하는데 등록금이 감당이 안 돼 어쩔 수 없었다. 2년 뒤 큰애가 학자금을 대출받아 복학했다. 모두들 건강하게 잘 커 줬다.

아내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를 빼고는 신발 공장을 다녔다. 작년에 정리하고 요양사 자격증을 땄다. 지금은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식구가 이해해 주려고 애쓰는 것 같다. 본사 점거하면서 감옥에 갔을 때 아내가 면회를 왔다. 아내는 마음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싸움이 길어지다 보니까 지쳤을 것이다. 친구들하고 술 한잔하다 보면 친구들 사는 모습을 보고 집에 와서 넋두리하기도 하지만 나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는 아내가 친구를 만나고 오더니 방에 들어가 혼자 울고 있었다."

그런 아픈 모습을 봐도 김경봉 씨는 선뜻 투쟁을 접을 수가 없다.

"희망이 보였던 적은 없다. 투쟁을 접을 수가 없으니 한다. 벌여놓은 게 있고, 우리가 늘 이야기하지만 연대라는 게 있다. 잘하든 못하든 마무리를 하고 그만두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게 이럴 때 하는 거다."

대법원에서 패소했지만 부당한 판결이라는 건 분명하다. 김경봉은 콜트콜텍 사장 박영호가 공장을 폐업했지만 노동자들이 투쟁을 멈추는 순간 바로 한국에서 공장을 다시 돌릴 거라고 생각한다. 박영호가 공장 부지를 사 놓은 건 그 이유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을 멈출 수 없다. 김경봉은 말한다.

"'노동자들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고 말하는 콜트콜텍 박영호 사장은 그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2. 이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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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1인시위하는 이인근 ⓒ 안건모


콜텍 해고자 이인근은 신탄진읍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차에서 대한통운 수화물을 담당하던 노동자였다. 마지막 열차까지 들어와야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술도 못하고 조용한 분이었다.

이인근은 어릴 적부터 고집이 있었지만 별로 두드러지지 않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대전에 있는 한국이연을 들어갔다. 내연기관 부품과 방직공장 부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일주일에 철야를 두세 번하는 고된 노동을 했다. 한 3년 일을 하다 군대에 갔다.

이인근은 제대하고 피스톤링을 만드는 공장을 다니다 친구 꼬임에 빠져 피라미드 사업을 했다. 6개월 동안 3년 동안 번 걸 다 털어먹고 다시 공장을 전전한다. 친구 삼촌이 하는 농자재 판매를 하다 IMF가 닥쳐 때려치웠다. 

1998년 8월 4일에 콜텍 기타공장에 입사했다. 회사엔 호봉제라는 게 없었다. 기본급도 몰랐다. 이인근은 기타가 완성돼서 나오면 포장하는 일을 했다. 완성된 기타에 바코드를 출력하고, 종이박스 안에 넣는 일이었다. 오전엔 좀 한가하다가 오후에 불량품을 고친 기타가 쏟아져 나오면 정신없이 바빴다. 60여만 원을 받았다.

그 무렵 친구 소개로 여자를 만났다. 청주에서 맥슨전자 공장을 다니던 여자였다. 1998년도에 결혼했다. 회사 일은 고되고 월급은 적었지만 작은 아파트로 이사도 가고, 아이들도 태어나고, 가장 행복할 때였다.

노조를 만들고 보였던 세상

이인근은 세상을 몰랐다. 노조라는 게 필요하다는 정도만 알았다. 인천 콜트엔 벌써부터 노조가 있었다. 하지만 대전 콜텍은 현장 통제가 너무 심해서 말도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다. 2005년에 해고된 여성 노동자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회사가 너무한다는 의식이 생기면서 노동자들이 회사에 쌓였던 불만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6년 4월, 이인근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의 도움을 받아 노조를 결성했다. 지부에서 교육도 받고 연대 집회에도 나갔다. 처음 가 본 곳이 청주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 하청 비정규직 투쟁 현장이었다. 연대 집회에 다니면서 부당함에 맞서서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세상에 눈을 떴다. 노조를 만들면서 지부 간부가 한 말도 인상에 남았다. "노동자는 하나다. 뭉치면 못할 게 없다." 근로기준법. 부당하게 착취당했던 사례. 남녀 임금 격차 문제, 휴식시간 문제. 그동안 얼마나 속고 살았는지 깨달았다.

이인근은 대전 콜텍에서 9년 차에 해고됐다. 회사와 지리한 싸움이 이어졌다. 조합원들은 지치고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금속노조 콜텍 지회장으로서 고공농성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2008년 10월 15일 새벽 4시, 한강 양화대교 남단 망원지구 송전탑에 올랐다. 날이 밝으면 경찰의 제지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잡은 시간이었다.

"한 발 한 발 올라가는데 무서웠다.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밑을 내려다보니까 아찔했다. 그냥 올라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죽을힘을 다해 올라갔다. 현기증이 났다."

머리 위로 15만4천V의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비가 올 때마다 젖지 않게 하려고 비닐을 이리 치고 저리 쳤다. 빗물을 타고 고압전류가 흐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열흘쯤 있다가 단식을 시작했다. 한 달 만에 몸무게가 58kg에서 49kg으로 줄었다.

노부모와 형의 가족, 그리고 아이들이 찾아왔다. 가족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뉴스에서 이인근의 얼굴을 알아보고 가족들이 달려온 것이다. 어머니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면서 핸드폰으로 내려오라고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니는 송전탑 위 아들을 향해 손짓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인근은 송전탑에서 11월 13일까지 20일 동안 단식농성을 했다. 언론에는 건강 악화로 내려왔다고 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지만 사실 건강 상태는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멀쩡하게 내려가면 '짭새'들이 채갈 게 뻔해 다 죽어가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려오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무 성과도 없이 몸만 축나서 내려왔다. 예상보다 언론 취재도 많이 오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 사회가 서운했다. 송전탑 밑에서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조깅을 하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면 마음이 더 스산해졌다."

지난 10년, 후회는 없다

이인근은 오랫동안 길거리 농성 현장에서 살다시피 해서 몸이 많이 상했다. 20일, 13일 동안 단식 투쟁해서 몸이 더욱 나빠졌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골다공증 판정도 받았다. 이인근은 2012년에 아내와 이혼했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아내도 지쳤다. 해고당할 당시 2007년도에 막내가 초등학교 5학년, 큰애가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할 나이였다. 지금은 엄마가 그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언젠가 아이들이 이해해 줄 날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이인근은 여의도 농성장에서 살다가 주말마다 대전에 내려가 쉰다고 사라진다. 그런데 막상 갈 곳이 마땅치 않다. 부모님 집에도 갈 때도 있지만 면목도 안 서고, 무엇보다 생활비도 드리지 못해 망설이게 된다. 여관에서 잘 때도 있다.

"가족과 헤어진 게 아쉽고 안타깝다. 아이들한테 미안하다.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멋모르고 세상에 나왔다가 친구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또래 애들이 누리는 걸 못 누리고 있는 게 미안하다. 그래도 사고 없이 커 주는 게 고맙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암담하지만 지난 10년, 후회는 없다."

3. 임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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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밴에서 카혼을 치고 있는 임재춘(오른쪽) ⓒ 안건모


콜밴에서 카혼(페루의 타악기)을 치는 임재춘. 양 입꼬리가 턱까지 내려온 모습. 시커먼 얼굴에 네모진 상자처럼 생긴 카혼에 앉아 양손을 번갈아 박자를 맞추는 임재춘을 보면 심통 난 사람처럼 보인다. 임재춘이 콜밴에서 카혼을 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기타를 치려고 했는데 보기도 싫었다. 카혼은 쉬운 줄 알았다. 그런데 처음엔 박자 맞추기가 너무 힘들었다. 콜밴 연습하면서 다투기도 많이 다퉜다."

기타만 30년

임재춘은 1962년에 공주에서 3남 2녀 중 장손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에게 삼강오륜부터 배우면서 산 '뼈대 있는'집안이다. 덕분에 한자는 많이 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삼강오륜은 다 외울 정도였다. 지방도 쓰고 산소에 관계된 예절도 많이 배웠다.

임재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1983년 스물한 살 나이에 의정부에 있던 성음악기에 입사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기계반에 있었다. 한참 기술을 배우면서 일하는데 군대 징집영장이 떨어졌다.

제대하자마자 다시 성음악기를 들어갔다. 그 성음악기가 큰불이 나는 사고가 있었다. 임재춘은 부평에 있는 삼익악기를 들어갔다. 1985년 여름이었다. 평일에 공장에서 일하고 일요일은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86년, 1년 반 동안 일하고 있는데 성음악기 공장장이 논산에 악기 공장을 만들었다고 오라고 했다. 그게 콜텍의 전신인 덕영산업이었다. 콜트 사장 박영호가 인수해 1년 반 만에 공장장을 교체했다. 한창 잘 팔리던 기타였던 '세고비아'가 중국으로 가 버리는 덕분에 콜트콜텍 기타 발주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노동자들 임금은 오르지 않고 박영호만 떼돈을 벌었다.

임재춘은 콜텍에서 해고를 당했지만 '기타'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진다. 기타의 종류, 최근 출시되는 기사 상품들과 그 소리 평가까지 줄줄이 나온다. 기타는 습도나 온도에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사계절이 있는 한국에서 만드는 기타는 계절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고 한다. 임재춘은 다채로운 기타의 소리를 위해 한국의 기타 공장이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임재춘은 또 미국 애틀랜타 기타의 본고장에서 6개월 연수도 받고 왔다는 자랑을 빼놓지 않는다. 오로지 기타만 만들면서 청춘을 보냈던 임재춘에게 정리해고는 청천벽력이었다.

"아빠, 지금이라도 다른 기타 회사 들어가면 안 돼?"

임재춘은 현재 두 딸하고 산다. 아내는 임재춘이 콜텍에 다닐 때 집을 나갔다. 덕영에서 콜텍으로 넘어갈 때 받은 퇴직금 1500만 원이 없어졌다. 2000년 무렵, 딸애들이 다섯 살, 세 살 때였다. 그 당시엔 큰돈이었다. 처가에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돈 갖고 잘살라고 포기했다. 그래도 정리는 해야겠기에 4년 뒤에 만나 이혼 도장을 찍었다. 아이들은 학교 들어갈 때까지 동생이 키우다가 지금은 임재춘과 같이 살고 있다. 큰애가 벌써 스물여덟, 작은애가 스물여섯이다.

정리해고 당한 뒤 임재춘은 적금, 교육보험 등 다 해지했고 지금은 빚만 늘었다. 농성장에서 생활할 때 대전에 있는 딸들이 아프다고 전화할 때 마음이 가장 아프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 딸들에게 미안해 먹고 싶은 걸 물어보면 "아빠가 돈이 어디 있어?" 하고 걱정을 해 준다. 아이들이 이렇게 물었을 때가 있었다.

"아빠, 싸움이 언제 끝나서 다시 기타를 만들 수 있을까? 끝나면 뭐할 건데?"
"지금이라도 다른 기타 회사 들어가면 안 돼?"

농성 10년 세월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큰딸은 은행을 다니다 계약해지를 당했다. 음악을 좋아해서 안산 예술대를 지원해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못 들어가고 논산 건양대 영상문화학과를 다닌다.

"투쟁이 빨리 끝나면 서울로 보내준다고 했는데 약속을 못 지켰다. 전공을 못 살려 아쉽다. 지금은 화장품 알바를 뛰고 있다."

작은딸은 여상을 나왔다. 임재춘은 작은딸을 집안의 보배라고 생각한다. 천안공업단지에 있는 공장을 1년 다니다 회계 경리 자격증을 따서 건설회사를 들어갔다. 지금 총무부장을 하고 있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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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춘의 투쟁일지.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글을 모았다 ⓒ 네잎클로바


임재춘은 이번에 '푼돈들'이라는 밴드의 일원인 최문선 씨와 공저로 책을 냈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네잎클로바 출판사)라는 책이다. 2013년 12월부터 2014년 5월까지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 코너에 연재한 '임재춘의 농성일기'를 묶은 책이다. 처음엔 글쓰기가 서툴렀다. 맞춤법도 틀리고 문장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한 문장 쓰고 머리를 쥐어짜내고 한 문장 쓰고 남한테 물어보면서 썼다. 임재춘은 그 책에 이렇게 썼다.

"우리들의 이 싸움이 우리들만의 싸움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정말 나아질까…. 의심스럽다."

임재춘은 이 농성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가면 뭘 해먹고 살지? 하는 걱정은 없다.

"그만두면 노가다를 하든가... 못 먹고 살겠나. 기타 공장 다시 들어갈 수도 있고. 안 되면 기타공장 만들면 되지. 1년에 20대, 30대를 만들어 이름 갖고 파는 사람 많다."

그러나 아직은 그만둘 수 없다. 임재춘은 늘 찾아오는 연대 단체들이 고마워 마음을 다잡는다. 더구나 박영호 때문에라도 더더욱 포기할 수가 없다.

"박영호도 이 농성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거다. 박영호는 공장 부지를 사 놓고 공장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떨어지기만 바라고 있을 거다. 자존심 때문에 얘기를 못 하겠지."

4. 방종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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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 화요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방종운 지회장 ⓒ 안건모


발음이 어눌한 방종운 콜트지회장. 시도 잘 쓰고 말도 또렷이 했던 방종운은 10년 투쟁에 의해 이렇게 변하고 있다. 2015년 10월 5일부터 11월 18일까지 45일 동안 단식 투쟁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식을 오래 하면 신경계통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종운은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옳기 때문이다.

섬마을 선생님이 꿈이었던 방종운

방종운은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조폐공사 인쇄공이었다. 그 당시 몇 안 되는 컬러 인쇄 기술자였다. 돈을 잘 번만큼 일가친척들을 많이 도와주는 데 써서 잘 살지는 못했다. 방종운 아버지는 조폐공사 사장한테 쫓겨났다. 사장이 자기 친척에게 기술을 배우게 하고 방종운 아버지를 쫓아냈다.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카바이드를 켜놓고 엿과 땅콩을 파는 포장마차를 했다. 어려서 꿈이 '섬마을 선생님'이었던 방종운은 중학교 친구들한테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들키는 게 창피했다.

방종운 집은 현재 미아역이 있는 자리였다. 어느 날 정부는 그 지역 무허가집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방종운은 1978년에 군에 입대한다. 연무대에서 신병 교육을 받고 공수부대 장기 하사로 차출당했다. 하사관에서 6개월 훈련받고 공수사령부에서 특수훈련 받고 5공수 여단에 배치받아 군 생활을 했다. 때는 부마항쟁이 일어났던 1979년. 5공수는 부마항쟁 진압부대였다. 당시엔 방종운도 군인 정신에 충실해 데모를 진압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1983년도 3월에 제대하고 공수부대 출신 특채로 대우자동차 생산직으로 들어갔다. 오로지 윗사람한테 잘 보여 '돈 많이 벌어 어려운 가정에 보탬이 되리라'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런 방종운에게 세상의 눈을 뜨게 해 주는 '마의 손길'이 뻗쳤다.

누군가가 천주교 주보를 계속 갖다 주었다. '빛과 소금'이라는 칼럼난에는 '빨갱이'들이 얘기하는 게 다 나와 있었다. 팀스프리트 훈련 때 미군이 트렁크 안에 산 사람을 놓고 사격 연습했다는 소식,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 병든 소를 수입해서 해먹었다는 소식들이 실려 있었다. 방종운은 "빨갱이 신문 아니냐"고 물었다. "이건 천주교 종교 주보다. 거짓말이 아니다"라고 했다.

방종운은 그 사람을 따라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 갔다. 현재의 천주교 부평사목이었다. 거기서 만났던 사람이 원풍모방 방용석 위원장, 이총각, 박순희 선배, 장남수, 콘트랄데이터의 박영숙, 박노희, 와이셔츠 주애희 등 걸출한 운동가들이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도 드나들었다. 들어가기 전에 가방 수색당하고, '뚜드려 맞고' 하던 시절이었다.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 때는 감옥 생활도 했다. 석방되고 노조 대의원으로 조합 활동을 했다. 그런 와중에 다른 부품사로 발령을 받았다. 발령을 거부했더니 회사는 방종운을 해고했다. 잘 모르고 사표를 써 주고 나니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속았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그 기억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자본가들은 합의 본다고 하면서 뒤에서 뒤통수 까는 놈들이다."

방종운은 1987년 8월 3일 인천에 있는 콜트악기에 입사했다. 1988년에 회사는 노조와 한 약속을 깨고 50세 되는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했다. 회사는 노조를 아예 없애려고 1991년에는 현대중공업 식칼테러 주범인 '노조 파괴자' 제임스 리를 노무 담당으로 영입했다. 방종운은 사노맹 중견 간부로 지목돼 안기부로 끌려갔다. 잠을 안 재우는 고문까지 당했다.

"4일 동안 고문하면서 나를 사노맹으로 몰았다. '안 불면 마누라 데리고 온다, 윗선이 누구냐, 선전물 쓴 놈 대라'고 했다."

방종운은 혐의가 없어 풀려났지만 밖에 나가서 안기부에 갔다 온 걸 발설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생선 냉동실에 넣어서 바다에 처넣거나 군부대 근처에 파묻어 버린다고 협박당했다.

방종운은 2008년에 콜트에서 정리해고됐다. 지회장으로 투쟁에 나서 길에서 10년을 보내고 있다. 경찰과 용역들에게 여섯 차례나 침탈당하면서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새누리당 김무성의 거짓말에 항의해 45일 동안 단식한 것 때문에 몸도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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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의 콜트콜텍 관련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단식 농성을 했던 방종운 ⓒ 오마이뉴스


10년 투쟁에 빚만 졌다. 아내와도 이혼했다. 딸은 동양공전 나와 1년 쉬었다가 스스로 학비를 벌어 성공회대를 졸업했다. 지금은 여기저기 알바를 하고 있다. 대학 나와 봐야 비정규직이 되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싸울 수밖에 없다. 농성을 포기할 수가 없다.

"더 싼 노동력으로 기타를 만들기 위해 국내 공장을 문 닫고 해외공장을 세운 것이다. 상표권 등록에도 악기 제조가 2023년까지 돼 있다. 한국지식경제부에도 한국 세계 일등 상품 콜트 악기라고 등록돼 있다. 이게 왜 폐업인가. 인천 콜트에서 인도 콜텍에 발령도 하고 작업 지시를 내렸는데 왜 폐업인가."

콜트 사장 박영호는 "노조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고 한다. 새누리당 김무성은 "노조 때문에 건실한 기업이 망했다"고 한다. 방종운은 그 거짓말을 밝혀내고 노동자의 명예를 찾고 싶다. 농성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작은책 2016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작은책 #안건모 #유이분 #콜트콜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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