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는 왜 푸르나

그곳에 깃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성을 보라

등록 2016.07.14 20:37수정 2016.07.14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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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일한 객손인 숙소를 홀로 지키고 있는 젊은 엄마의 딸아이와 조카 ⓒ 송성영


란드룩에서 사흘째, 아침나절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치고 방문 앞에 납작 엎드려 있던 멍멍이가 어디론가 떠났다. 어제 오후 길에서 만난 녀석인데 이층에 있는 숙소 방문 앞까지 따라왔었다. 먹을거리를 요구하지 않고 비가 오는 내내 내 방문 앞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네팔에서도 인도처럼 끈 풀린 개들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다가 인연 닿는 사람을 만나면 잠시 따라나서곤 한다. 먹을거리와 상관없이 따라나서면서 그 인연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뭔가를 먹어야 할 시간이다. 방문 앞에 있던 멍멍이 녀석 역시 어디론가 먹을거리를 찾아 나선 모양이다. 아래층으로 내려서자 꼬마 아이 둘이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내가 합장을 하며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자 녀석들이 부끄러운지 몸을 비틀며 머뭇거린다. 손님이라곤 내가 전부인 텅 빈 숙소를 외롭게 지키고 있는 젊은 여자가 그 뒤에서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에게 답례 하라는 손짓을 보낸다. 아이들이 말없이 합장을 한다.


"이 아이들은 누구입니까?"
"내 딸입니다. 남자아이는 조카입니다."
"예? 결혼 했습니까?"

나는 그때서야 그녀가 아가씨가 아니라 젊은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에게 이곳 란드룩에 오기 전에 톨카에서 먹었던 사과 케이크를 요청하자 메뉴판을 건네며 다른 음식을 시키라고 말한다. 비수기라서 요리사가 휴가를 갔다며 자신이 요리할 수 있는 몇 가지 음식만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단맛 나는 빵 종류를 먹고 싶습니다. 이 근처에 케이크를 파는 상점이 없습니까?"
"뒤편에 있는 상점에 가보세요. 그곳에서 팔 것입니다."

날줄과 씨줄이 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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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감 재료인 삼실을 길게 늘어놓고 있는 란드룩 아낙네. 뒷편에 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안나푸르나가 보인다. ⓒ 송성영


그녀는 자신의 속소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내게 구김살 없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돌계단을 밟고 숙소 뒤편으로 오르자 저 만치 안나푸르나 주변으로 흰 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 상점 앞마당에서 한 아낙네가 대마(삼베)에서 뽑은 것으로 보이는 실을 길게 늘어놓고 옷감을 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케이크 있습니까?"
"아니요."
"빵은 있습니까?"
"아니요."

그녀가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빙그레 웃으며 무조건 "노"라고 대답한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그녀는 아무도 없다는 손짓을 한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짜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대화를 할 수 없어 사진기를 꺼내 들고 저만치 쪼그려 앉아 그녀의 일손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옷감은 날줄과 씨줄로 짜여 진다. 날줄은 세로로 놓인 실이고 씨줄은 가로로 놓은 실이다. 어느 한 줄이라도 없으면 옷감을 짤 수 없다. 사람살이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안나푸르나 기슭에 살아가고 있는 네팔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애시 당초 이곳에 올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언어든 몸짓이든 이들과 소통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날줄과 씨줄을 조화롭게 짜지 않으면 뒤 엉키듯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제 욕심만 챙긴다면 사람살이는 엉망진창이 된다. 날줄과 씨줄의 조화로움 속에서 아름다운 비단이 짜지듯 성인들의 지혜로운 가르침에 따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 조화롭게 살다보면 사람살이 또한 비단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경천위지'(經天緯地)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보통 하늘과 땅을 다스려 온 천하를 다스린다(얻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경천위지의 경(經)은 날줄, 위(緯)는 씨줄을 뜻한다. 날줄과 씨줄은 조화다. 하늘과 땅은 누군가가 다스릴 대상이 아니다. 다스리는 게 아니라 조화 그 자체다. 하늘과 땅은 상생한다. 지혜로운 성인들이 그랬듯이 그 이치를 깨달을 때 비로소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천하를 얻는 것은 다스리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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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와 빨래. 그동안 사진기 렌즈를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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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와 전기 줄. ⓒ 송성영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뗀둑(수제비 종류)으로 요기를 하고 있는데 창문 사이로 안나푸르나 앞에 걸려 있는 빨래 줄과 저만치 전기 줄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사진이 찍고 싶어졌다. 그동안 눈에 거슬리는 것을 거부하고 순백의 안나푸르나를 찍으려 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들, 안나푸르나와 함께 잡혀 오는 저 빨래와 전기 줄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겠는가. 저 사람살이의 흔적인 빨래줄과 전기줄이 없었다면, 거기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저 안나푸르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동안 거부해왔던 빨래줄과 전기줄이 걸려 있는 안나푸르나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이곳 사람들에게 안나푸르나는 단지 생활의 일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킹을 즐기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산이거나 또 어떤 등반가들에게는 그 어떤 산보다 높은 산봉우리, 안나푸르나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히말라야 기슭에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이 거처하는 다가갈 수 없는 산, 생명수를 내려주는 산이거나 늘 곁에 있는 눈 덮인 높다란 뒷산이나 앞산일 것이다.

밤길 떠나는 청춘남녀를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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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의 젊은 엄마와 그녀의 동생이 손가락만한 굵기의 삶은 고사리를 말리기 위해 반으로 쪼개고 있다. ⓒ 송성영


마을을 벗어나 전기 줄이 걸려 있는 안나푸르나 사진을 찍고 돌아올 무렵 숙소를 지키는 젊은 아줌마가 동생과 함께 고사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곳 고산지대의 고사리는 한국의 고사리와는 달리 손가락 굵기 만하다. 그 삶은 고사리를 쉽게 말리기 위해 반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나는 고사리라는 영어 단어를 알지 못해 손짓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북인도 코사니라는 마을에서는 저걸 먹지 않던데 여기 사람들은 먹나요?"
"예, 끓는 물에 삶아 요리합니다."
"한국 사람들도 즐겨 먹습니다."

북인도 코사니 사람들은 독성이 강해 먹으면 큰일 난다고 했지만 이곳 란드룩 사람들은 한국에서처럼 독성을 제거하기 위해 끓는 물에 삶는다. 그 삶은 고사리를 바싹 말려 보관해놨다가 물에 부풀려 요리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한국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요리해 먹는다고 했더니 먹거리가 같다는 것에 동질감을 느꼈는지 반겨 웃는다. 내친김에 그녀에게 내가 알고 있는 영어를 총동원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실례지만 몇 살입니까?"
"스물 넷입니다."
"네팔 여자들은 보통 몇 살에 결혼 합니까?"
"보통 열여덟이면 결혼하는데 저는 열아홉에 결혼했습니다."

인도의 시골에서처럼 네팔 시골에서도 대부분 중매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그녀는 란드룩 마을 청년과 연애결혼을 했다고 한다.

"네팔 시골에서도 연애결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까?"
"아니요. 대부분 부모가 짝을 맺어 줍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데 집안에서 반대하면 어떻게 합니다."
"우리 부모 세대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도시로 나가 살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눈 맞은 청춘남녀들이 도시로 야반도주해 살림을 차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눈을 피해 짐 가방을 챙겨 동구 밖 어딘가에서 만나 두 손 꼬옥 잡고 밤길을 떠나는 애뜻한 청춘 남녀를 상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오래전 한국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말했더니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다가 어쩌면 저 젊은 엄마도 열아홉, 아리따운 나이에 죽고 못 사는 동네 청년과 야반도주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크나큰 불행이다. 사랑을 쫓아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일이다.

"남편이 보이지 않던데... 어디에 있습니까?"
"포카라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옵니다."

인도 시골과는 달리 네팔 시골에서는 보통 부부가 함께 농사일을 하는데 이곳 남자들은 대부분 포카라와 같은 대도시에 나가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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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 지붕 위에 손질한 고사리를 펼쳐 놓고 있다. ⓒ 송성영


그녀의 동생이 손질한 고사리를 양철 지붕 위에 펼쳐 놓는 것을 보면서 내가 '나마스테' 합장을 하며 일어서자 그녀의 딸아이가 엉겁결에 합장을 한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자 녀석이 배시시 웃는다. 젊은 엄마도 흡족한 표정으로 따라 웃는다. 우리 모두가 기분 좋게 웃는다.

숙소 2층으로 올라가면서 딸아이의 순박한 미소를 떠올리다가 문득 내가 그토록 저 순백의 안나푸르나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란드룩에서의 사흘 내내 나는 이곳 어린 아이처럼 순박한 미소를 닮은 란드룩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내가 안나푸르나를 만나러 온 것은 그 순박한 사람들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안나푸르나가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깃들어 살아가고 있는 순박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빼어난 경관의 명당자리라 한들 거기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심성이 고약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청와대라는 좋은 명당자리를 꿰차고 앉아 온갖 색동옷으로 패션쇼나 벌여가며 제 나라 국민들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하고 다른 나라의 비위나 맞춰 가며 제 민족과 벽을 쌓아 가고 있다면? 청와대의 명당자리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이곳 란드룩 사람들처럼 순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깃들어 살아간다면 혼잡한 서울 또한 아름다운 도시가 될 것이다. 안나푸르나 기슭에 사람이 없거나 자본에 찌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면 안나푸르나는 그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삭막한 불모의 산, 단지 눈 덮인 높은 산봉우리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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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드룩 마을의 옥수수 밭과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람살이가 있기 때문이다. ⓒ 송성영


#안나푸르나 #날줄과 씨줄 #사람과 사람 #명당자리 #아름다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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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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