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와 원숭이표지
동녁
불교에 푹 빠진 인도 철학자, 과학을 사유의 기반으로 해 종교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생물 철학자, 이 둘이 불교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과학 영역과 종교 영역에서 서로 각을 세우며 긴장감 있는 토론을 벌였을 테다.
생물 철학자 최종덕과 인도 철학자 심재관이 나눈 대담을 엮은 책 <승려와 원숭이> 얘기다. 책 제목에서 '승려'는 불교, '원숭이'는 생물학을 상징한다. 또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책은 자아부터 시작해서 윤회, 감정, 방편, 진화, 문화, 종교, 믿음 등 12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과연 불교와 진화 생물학 사이에는 어디까지 대화가 가능할까? 둘 사이에 어떤 공통된 사유가 있고, 어떤 대립되는 사유가 있을까?
과학 철학자 최종덕은 불교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종종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 비해 인도 철학자 심재관은 시종 수도승처럼 차분하다. 분명 긴장감 넘치는 토론인데도 심재관의 말은 느긋하다. 이들의 대화가 보여 주는 긴장감 속 차분함의 얽힘은 독특한 분위기를 낳는다.
'참 자아'를 찾는다? '자아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담의 첫 주제는 '자아'다. 혹여 어떤 이는 불교가 참 자아를 찾는다고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진정한 자아 또는 고정된 자아가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세상에는 그 어떤 본질적 존재도 없다고 말한다. 인도 철학자 심재관은 이렇게 말한다.
"자아를 찾아가는 길과 자아를 버리는 길은 엄청난 차이가 있겠죠. ... 자아를 버린다는 뜻은 자아를 신비하고 초험적인 무엇으로 포장해 놓은 형이상학을 버린다는 뜻과 같아요. ... 본질이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다는 깨달음, 여기서부터 붓다의 가르침이 시작된다고 봅니다."(24~26쪽)
본질이 없다면, 자아란 대체 무엇인가? 생물 철학자 최종덕이 이렇게 풀이해 준다.
"양파를 쥔 원숭이는 양파 껍질을 먼저 깝니다. 그런데 껍질을 벗기고 보니 그 안에 껍질이 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원숭이는 껍질을 다시 깝니다. 그러면 안에 껍질이 또 있죠. 이러다 보면 원숭이는 결국 아무 내용물도 건지지를 못하죠. ... 바나나는 그 안에 본질이 있어서 겉을 벗겨내면 그 안에 알맹이를 건질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양파는 아무 것도 없어요. 껍질 그 자체가 알맹이라는 것을 원숭이는 모르는 거지요. 마찬가지예요. 자아라는 것은 양파와 같아요. 껍질을 벗겨서 그 안에 참 자아가 따로 숨겨져 있다는 생각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 그 껍질 자체가 바로 내 모습이고 내 진정한 자아인데, 그걸 자꾸 벗겨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허상이라는 겁니다."(33~34쪽)
생물 철학자가 불교의 '무아' 개념을 이토록 잘 풀이한다. 자아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는 데에 불교학자도 생물 철학자도 의견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진화 생물학과 불교는 또 어떤 친화력이 있을까?
진화론과 불교의 연기론은 유사한 세계관을 지닌다!?진화론과 연기론에서도 둘은 착떡궁합이다. 최종덕은 불교와 소통 가능한 영역은 진화론의 사유 구조라고 말한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진화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갈라지면서 다양한 생명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끝없는 변화와 다양성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생명체는 어느 것도 고정된 종으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과정적 존재'인 셈이다.
진화론이 본질을 찾는 형이상학의 사유를 부정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끝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종의 본질을 추려내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러한 사유에 대해 인도 철학자 심재관은 "불교가 가장 꺼리는 단어는 '절대'와 불변'"(223쪽)이라고 맞장구치며, 다양성과 변화의 역동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모든 생명종은 그 나름대로 생태계에서 위치가 있으며, 서로 끈끈하게 얽혀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은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졌는데 내 몸 속에 세균이 그 5배 정도가 산다. 우리 배 속에 박테리아가 없으면, 소화를 할 수 없다. 식물도 박테리아가 없으면 생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모든 생물은 공존하고 있으며, 함께 진화한다. 이를 진화 생물학에서는 '공진화'라고 한다.
이러한 진화론의 세계관에 대해 인도 철학자 심재관은 "'나'의 존재가 다른 생명들에 의해 얽혀서 존속하고 있다는 이해가 바로 불교의 메시지"(148쪽)라고 답한다. 나아가 진화론의 세계관과 불교의 연기론이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것이 연기론"(150쪽)이라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진화론 하면 '약육강식'을 떠올리는데,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약육강식'은 다윈의 진화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제국주의 침략이 벌어지던 19세기의 사회학자 스펜서가 주장한 '사회 진화론'의 주장이다.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을 다윈의 생물 진화론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진화론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넘어 진화론의 세계관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도 역할이 있다.
"종교는 진화의 산물" vs. "불교에 대한 이해 얕아"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불교와 진화 생물학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서로 충돌하며 긴장감 있는 토론이 벌어지는 장면이다. 생물 철학자 최종덕은 종교는 '공동체의 번성을 위한 것'이고, 그 기원은 '공동체의 유지와 관리'에 있다고 말한다. 결국 '종교는 진화의 산물'(문화적 인지 능력을 진화시켜 온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여러 차례 '도발을 감행'한다.
"인간의 집단성이 바로 종교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진답의 존속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는 거지요."(239쪽)
"저는 인간이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생물학적 존재라는 것을 항상 강조하는 편입니다. ... 인간은 신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연재해의 공포, 이웃 부족의 공격에 대한 근심, 어두운 밤과 숲의 공포에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대비하는 조직적 권력을 꿈꾸고 있다고 봐요. 고대 구석기인이나 지금의 현대인 모두 마찬가지죠."(307쪽)
종교가 집단의 특성이라는 주장은 19세기 사회학자 뒤르켐부터 오늘날 진화 생물학자들까지 줄곧 제기하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측면이 분명 있다. 구석기 시대의 종교 행위나 유대교와 같은 고대의 민족 종교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데 불교도 이에 해당할까? 불교 철학자 심재관은 "우리 대화가 이렇게 충돌하는 모습이 장점"(264쪽)이라며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한 채 방어와 반격을 한다.
"단순히 인류학적인 보고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요. ... 그런 인류학이나 종교학 서적들이 야기하는 개별 종교들의 일반화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지 않아요. 너무 많은 변수들이 있어요. 결국에는 해당 종교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얘기해 주지 않거든요."(262쪽)
그는 어떤 가정을 전제로 개별 종교를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불교는 공동체의 유지와 관리에는 관심이 없는 '반사회적' 종교다. 깨달음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 보며 지극히 개인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수행을 위해 가족마저 버리고 세상을 떠나버리지 않던가!
결국, 생물 철학자 최종덕은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구도의 길을 걷는 불교에 대해 판단을 달리한다. 진화 생물학은 모든 종교란 공동체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나온 진화의 산물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런데 불교는 그 가설에 맞지 않는 것이다!
책에서는 진화 생물학의 가설로 불교를 판단하는 것은 유보하는 정도로 넘어간다. 그런데 '과학적 사유'란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나오면 가설을 수정한다. 그럼으로써 과학은 계속 발전한다. 그렇다면 이제 진화 생물학의 가설을 수정할 차례가 아닐까? 물론, 인간의 다양한 문화는 진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진화의 산물을 거스를 줄도 아는 역설의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