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석빙고석빙고는 내벽은 잘 다듬은 돌로 쌓아 올리고 지붕을 마찬가지로 돌을 다듬어 덮은 뒤 흙으로 두껍게 덮어 더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 뒤의 돌로 쌓은 도랑은 석빙고에서 얼음이 녹은 물이 빠지도록 한 수로며, 석빙고의 외벽 하단도 막돌로 허튼층쌓기를 해 하중을 지탱할 수 있도록 했다.
정덕수
하지만 이런 시설을 만드는 과정부터 겨울철에 냇가나 강변에서 얼음을 떼고 옮겨 저장하는 과정에 과연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지는 않았을까. 그 의문을 푸는 열쇠는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의 김훤주 대표가 들려줬다. "조선시대 이 석빙고와 관련해 얼음을 뜨는 과정을 시로 표현한 인물이 있는데요"로 시작해서 김창협이라는 선비에 대해 말이다.
그 김창협의 시를 잠시 뒤 살펴보고 우선 김창협의 가계와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김창협(金昌協, 1651년(효종 2년) ~ 1708년(숙종 34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의 증조부가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로 유명한 좌의정 청음 김상헌(金尙憲)이니 사대부가의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는 중화(仲和)며 호는 농암(農巖), 삼주(三洲)고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운수거사 김광찬(金光燦)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문곡 김수항(金壽恒)이고,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이러한 대단한 권세를 누린 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현종 때 진사에 급제하고 숙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성과 청풍 부사에 이른 김창집의 형 몽와 김창집(金昌集) 또한 영의정을 지냈으며, 조선 말기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한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의 6대 조부다.
이제 김창협의 시를 살펴보자.
착빙행(鑿氷行)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어니 사람들 우글우글 강가로 나왔네. 꽝꽝 도끼로 얼음을 찍어내니 울리는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네. 찍어낸 얼음이 산처럼 쌓이니 싸늘한 음기가 사람을 엄습하네. 낮이면 날마다 석빙고로 져 나르고 밤이면 밤마다 얼음을 파들어 가네. 해짧은 겨울에 밤늦도록 일을 하니 노동요 노랫소리 모래톱에 이어지네. 짧은 옷 맨발은 얼음 위에 얼어붙고 매서운 강바람에 언 손가락 떨어지네. 고대광실 오뉴월 무더위 푹푹 찌는 날에 여인의 하얀 손이 맑은 얼음을 내어오네. 난도로 그 얼음 깨 자리에 두루 돌리니 멀건 대낮에 하얀 안개가 피어나네. 왁자지껄 이 양반들 더위를 모르고사니 얼음 뜨는 그 고생을 그 누가 알아주리. 그대는 못 보았나? 길가에 더위 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들이 지난 겨울 강위에서 얼음 뜨던 이들인걸. 이 시를 대하는 순간 지방에서의 석빙고에서나 백성을 수탈하였으리란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동빙고나 서빙고에 저장할 얼음을 뜨러 한강에 많은 백성들이 내몰렸으며, 무명옷 한 장 겨우 걸치고 버선도 못 신은 맨발에 나탈거리는 짚신 겨우 꿰고 미끄러운 빙판에서 얼음을 떼야 하는 고통을 고대광실에서 떵떵거리는 벼슬아치와 임금이 알았겠는가.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어느 대갓집 사랑채에 앉아 여인들의 손길로 건네주는 얼음을 김창협 또한 받아보았고, 그때 자신이 목격한 무더위에 지쳐 죽은 백성들의 시신과 한겨울 살을 찢는 추위 속에 얼음을 뜨는 백성이 같음을 깨달았던 것 아닐까.
이 시를 지은 김창협은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벼슬을 내놓고 산중으로 들어갔다. 이후 아버지의 누명이 풀려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지돈녕부사 등으로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끝내 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