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이 너무 나오지 않자 길바닥에서 지도를 확인중인 아들.
추미전
걷기 시작한 지 2시간, 우리는 제대로 된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왔고 등산길에 꼭 필요하다는 사탕 하나 챙겨오지 않았는데 식당은 고사하고 구멍가게 하나 나오지 않는다. 올레길 안내원에게 물었을 때는 분명히 가는 중간에 식당들이 있다고 했는데 한 곳도 찾을 수가 없다.
다행히 생명수나 다름없는 물병은 챙겨 왔지만 허기가 져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다. 나는 슬슬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집에서 같으면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칠 텐데 그런 투정도 없이 걷고 있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대견하다. 거기다가 밴드를 감은 손가락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 앓는 소리를 내니 되려 나를 계속 걱정해준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대견했나 ?" 말을 하지는 않고 혼자 속으로 생각을 한다.
둘 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에야 드디어 위미라는 작은 동네가 나타났다. 동백나무로 유명한 이 마을은 겨울에 만나면 온 동네가 동백꽃에 뒤덮여 절경을 이룬다고 하는데 지금은 짙푸르게 자란 동백나무들만 빽빽하다. 혹시 식당이 없을지 간절하게 찾고 있는데 드디어 식당이 하나 나타났다. 다짜고짜 보이는 첫 번째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도 뭐고 일단 에어컨이 빵빵 나오니 더위를 좀 식히고, 무엇으로든 허기를 면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들어가 보니 정식을 파는 식당이다. 돼지갈비에 꽁치구이까지 나오니 아주 맛있게 점심을 해결했다. 그런데 손가락은 점점 통증이 심해져 젓가락질을 잘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식당에서 허기를 해결하고 풀었던 배낭을 다시 메니 배낭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길을 나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사람이라곤 여전히 하나도 없다. 아들이 휴대폰에 저장돼 있는 노래를 튼다. 요즘 아들이 빠져 있는 랩의 향연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가사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데 흥겹기는 하니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진다. 누구냐고 물으니 비와이, 슈퍼비, 씨잼... 어쨌든 이들이 고된 걸음에 위로가 되니 고마울 뿐이다.
좁은 산길을 벗어나 또 작은 동네를 만났다. 동네어귀 그늘에 나와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는 우리를 손으로 불렀다. 가까이 갔더니 옆에 앉으라고 한다. 그리고는 완전 제주 사투리로 말씀을 하셔서 반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 더위에 무슨 짓이냐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제주에 살아도 이렇게 더운 날씨는 처음 보는데 어떻게 걷는냐는 거다. 할머니 옆에 앉았더니 또 다른 할머니도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셨다. 이 곳이 마을의 명당이라고 하는데 바람이 거의 에어컨 수준으로 분다. 5코스 구간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할머니 옆에 앉아 30분쯤을 더위를 피하다 다시 길은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