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좀균' 같은 병역 기피, 그 원인 네 가지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Ⅰ부 초록색 견장 (2)

등록 2016.08.23 11:06수정 2016.09.0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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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은 최상의 스승이다
영국인들은 역사를 매우 사랑하며 존중한다. 그들은 개인의 역사까지도 매우 사랑한다. "체험은 최상의 스승이다"(Experience is the best teacher)고 하여 기성세대의 체험담을 대단히 귀중한 자산으로 여기며, 여기에서 교훈을 배운다.


지식인의 사회비판은 자동차의 제동장치(브레이크)와 같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곧 추락하고 만다. 이번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연재는 체험에서 우러난 기록이다. 한 개인의 기록이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지난 시대를 이해하고, 앞날을 살아가는데 지혜를 얻기 바란다. 왜냐하면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신문은 사회의 목탁이요, 거울이다. 비판이 없는 일방의 충성과 맹종처럼 무서운 게 없다. 과거 나치즘이나 파시즘, 우리나라 유신시대가 그 단적인 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동안 나의 글은 늘 비판에 따르는 대안을 제시해 왔다. 이번 연재 기사 '제Ⅰ부 초록색 견장'에서 다루는 병역문제, 군내 구타 및 부패 부조리 문제 등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의 하나였다. 그 원인과 대안 및 해결책은 마지막 회에서 깊이 다룰 예정이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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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중대 연병장에서 소대원과 함께(뒷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철모를 쓴 이가 기자다. 1969. 9.) ⓒ 박도


전방소총소대

나는 소대장에 부임한 후 가장 먼저 소대원 현황 파악에 나섰다. 그동안 소대장 대리근무를 했던 소대선임하사 박 중사로부터 소대원 신상명세서를 인계받아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의 신상을 살피면서 이름을 빨리 외우려고 애썼다. 내가 소대원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줄 때 그들은 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소대원은 모두 40명이었는데, 소대본부에는 소대장, 선임하사, 향도, 전령, 기재계(서무병) 등이었다. 그리고 소대는 4개의 분대로, 각 분대는 하사인 분대장과 분대원 8명으로 모두 9명이었다.


소대원을 학력별로 분류하자, 초등학교 중퇴 및 졸업 15명, 중졸 13명, 고졸 8명, 대학 재학 4명이었다(1969년 7월 당시). 박 중사는 이는 상급부대나 후방부대보다 매우 낮은 편이라고 했다. 출신지 별로 분류해보니 농어촌 20명, 중소도시 15명, 서울 출신 5명이었다.

그들의 입대 전 직업도 천태만상으로 농사꾼, 미장, 이발사, 구두수선공, 중국집 요리사, 평택 쑥고개에서 미제 물건 장사하다 온 친구 등 사회 저변에서 종사했던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대전-천안 간 열차 전문 소매치기 출신도 있다고 박 중사는 귀띔했다.

나이도 나보다 연상인 소대원이 대여섯 명이나 됐는데, 그들 대부분은 기혼자로 서른을 넘긴 소대원도 있었다. 그들은 호적을 고치는 등, 입영을 이리저리 미루다 어쩔 수 없이 입대했던 것으로 보였다.

우리 부대는 서울 인접부대지만 곧 전방부대와 교체하는데다가, 심한 교육에다가 야간에는 잠복 경계근무로 사실상 최전방 초소(GP, Guard Post) 근무보다 오히려 더 고달프다고 박 중사는 보충 설명을 했다. 그 무렵 우리 중대 4개 소대 중 3개 소대는 파견 중으로, 우리 소대만 중대본부에 남아 5분대기조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24시간 늘 긴장 속에 근무했다. 그들은 자조적으로 '오줌 누고 X 볼 새도 없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 등의 말을 뱉으며 현실의 불만을 삭이고 있었다.

석유램프, 만감이 교차하다

오후 5시, 저녁 식사를 마친 소대 병력의 절반은 야간 잠복근무 준비를 한 뒤 연병장에 모였다. 그들은 야간위장과 군장검사를 마치고 각 초소로 떠났다. 남은 절반의 병력은 위병소, 불침번 등 자대 근무자였다.

첫날 나는 그 모든 걸 지켜보기만 했고, 그동안 소대장 대리근무를 했던 박 중사가 능숙하게 지휘했다. 야간 근무조가 모두 떠나자 소대 내무반은 고즈넉했다. 내 숙소는 소대 막사 안에 두어 평 정도로 칸막이를 한 곳으로, 야전 침대와 간이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더플 백을 놓자 몹시 좁았다. 그래도 한 내무반을 쓰는 소대원에 견주면 그만해도 족했다. 전령 박진술 일병은 중대본부 병기계로부터 칼빈(CAR) 소총, 철모, 배낭, 모포 등 지급품을 모두 받아왔다.

첫날부터 중대 상황실에서 당직 근무를 섰는데, 3개 소대장들이 파견 중이라 말뚝 당직 근무였다. 부대 일대는 그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상황실이나 막사 모두 석유램프를 켜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상황실 외 부대는 칠흑으로 적막강산이었다. 램프 등불을 바라보니까 만감이 교차했다.

할아버지의 소망

우리나라 근현대사인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 한반도 어느 곳인들 애달픈 사연과 아픈 이야기들이 없겠는가. 내 고향 경북 구미도 그런 사연과 얘기들이 덕지덕지 널려 있었다. 해방공간인 1946년 10.1 항쟁과 좌우이념 대립으로, 그리고 3년 남짓 계속된 한국전쟁으로 숱한 젊은이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또 많은 이들이 행방불명이 됐다.

그 무렵 우리 집은 구미면 원평동 장터마을이었는데 옆집 김 목수, 길 건너 참기름집, 그리고 오거리 술도가 공 영감 아들은 휴전이 돼도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어른들이 몰래 쏘곤대는 말로는 그들은 전쟁 중 부역 때문에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국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하거나 상이군인으로 돌아온 이도 무척 많았다. 옹기전 독장이 영감 아들은 유골상자로 돌아왔고, 수리조합에 맹 주사는 전쟁 때 수류탄 파편으로 왼손을 크게 다쳐 갈퀴 모양의 의수(義手)를 줄곧 달고 다녔다. 그밖에도 목발을 짚고 다니는 이도 숱하게 많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앞날이 크게 걱정이 되신 듯, 이따금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당신의 희망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니가 군에 갈 나이가 될 때는 우리나라가 남북 통일이 돼 군에 가지 않아도 될 거다."

하지만 그 손자가 군에 다녀오고, 손자의 손자뻘이 군에 가는 이즈음도 분단 문제는 한 발자국 진전이 없었다. 한때 금강산 관광도 하고, 남북 경협으로 개성공단도 여는 등, 분단 후 오랜만에 남북 해빙 무드였지만 정권이 바뀌자 금세 원위치하여 다시 냉전시대로 돌아갔다.

이즈음도 내 어릴 때나 별반 다름이 없이 젊은이들의 병역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온 나라가 골치를 썩이고 있다. 지금도 공직자 청문회에서는 본인과 직계자녀의 병역문제가 단골 메뉴로 오르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자녀의 병역문제로 낙선의 직격탄을 맞은 후보도 있었다.

솔직히 그동안 대한민국 젊은이들 가운데 군 입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 일부 부모나 당사자는 어떻게 하든 눈앞에 닥친 병역을 피하는 게 상수라고 여겼다. 그러기 위해 심지어 국적 변경 등, 온갖 방법이 다 동원됐음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병역을 기피하고자 대학에 입학시키고(한때 대학생인 경우 일부 학과는 병역 특혜가 있었다), 호적을 고치고, 나일론(가짜) 환자를 만들거나 병무담당자나 군의관에게 뇌물을 써서 면제 판정을 받게 하는 등…. 그 수법은 천태만상으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심지어 병역 미필자 가운데는 자기 손가락을 자르는 자해자까지도 있었다.

병역 기피의 원인

이러한 세태에 병역을 기피하려는 젊은이들만 무조건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들이 병역을 기피하는 까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남북의 군사대결은 우리 내부적인 문제라기보다 강대국 간 이해관계에 따라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세계전쟁사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가장 비극적인 동족상쟁의 대결장이 라는 점이다. 그래서 지난 한국전쟁 때에는 한 집안 또는 한 형제간에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가 하면, 어떤 이는 국군으로, 인민의용군으로입대하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지금은 분단으로 남북 겨레가 어쩔 수 없이 헤어졌지만 그 언젠가는 합쳐질 한 핏줄이다. 이런 분단 문제를 남북 지도자들이 정치적으로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치 않고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데 대한 젊은이들의 거부감이 내재돼 있으리라.

둘째는 병역 부조리 문제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병역은 거미줄과 같았다. 거미줄에는 독수리나 제비처럼 힘이 세거나 재빠른 날짐승은 걸려들지 않지만 하루살이 날벌레들은 마냥 걸려들기 마련이다. 이처럼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자들은 병역의 거미줄 망을 쉽게 피해 가거나, 입대를 해도 후방이나 비전투부대의 편한 보직을 받았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210~211쪽에서 김동춘·홍성원·서중석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저 도망가서(병역을 기피하여) 일신의 생을 도모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김동춘)

"권력을 쥔 자, 가진 자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고, 보낸다 하더라도 안전한 후방에 배치되도록 '백'을 쓰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대학은 징집 면제를 받으려는 학생들의 은신처로… 군대는 주로 못살고 힘없는 농민의 자식들이 갔다."(서중석)

"한국 병사는 전방에서 전투 중에 전사할 때 '어머니'를 부르는 대신에 '빽' 하고 죽는다고 한다. 그는 백이 없어 안전한 후방으로 못 빠지고, 최전방 고지에서 적탄에 맞아 죽게 되었다. 자기 죽음이 백 때문임을 알고, 그는 그 백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서 최후의 순간에도 '빽' 하고 죽는다는 이야기다."(홍성원)

셋째는 군 복무 중 전사자 및 부상자에 대한 원호문제였다. 5·16 후 원호법 제정과 원호청(현 국가보훈처) 설립으로 지금은 크게 개선됐지만, 그 이전에는 국가의 원호 대책은 보잘 것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상이군인 가운데는 의수로, 또는 목발을 짚은 채 시장이나 거리, 열차 객실을 지나다니면서 구걸로 연명키도 했다.

그런 광경을 본 젊은이들은 군에 입대한 걸 주변머리 없는 것처럼 여기며, 군에 입대한 사람만 바보라고 가급적 입영을 기피하려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넷째는 병영 내의 구타 및 인권침해, 그리고 군내 부정부패, 부조리 등 문제다. 나라에서 국방을 위해 젊은이들을 불렀다면 그들을 최상의 대우를 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몽둥이로 때리고 기합을 주는 등 일부나마 군은 인권의 사각지대로 인식된 점이다.

내 어린 시절 집안 아저씨나 형들이 휴가 와서 군대 얘기를 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매 맞은 얘기와 배고팠던 얘기였다. 그래서 가족들과 친지들은 휴가자 호주머니에 용돈을 찔러 주었다. 부모들은 군생활 중 매 맞지 말라고, 굶지 말라고 매달 돈을 보내주곤 했다.

또한 군대 내 부정부패 부조리 문제는 창군 이래 지속된 문제였다. 대한민국의 부정부패 부조리는 군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그 뿌리가 무좀균처럼 깊다. 병사들에게 돌아갈 군량미를 착복하는 바람에 병사들이 집단 아사(餓死)했던 국민방위군 사건을 비롯하여 부대 쌀이나 군 보급품을 팔아먹거나 심지어 전방 고지의 나무를 베어 숯을 구워 착복한 모리배들도 있었다. 그래서 한때 우리 사회에서는 부정축재한 고위 장성을 '똥별'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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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특무상사로 전선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1950. 10.) ⓒ NARA


눈앞에 닥친 병역문제

나는 그런 얘기를 줄곧 듣고 자라다가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눈앞에 병역문제가 닥쳤다. 입학 동기생 가운데는 병역을 일찍 마칠수록 좋다면서 입학 한 학기 만에 또는 1학년을 마치자 여러 명이 입대했다.

그런데 나는 재학 중 군 입대가 싫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고교 시절 집안사정으로 남다르게 4년을 다녔기에 입대로 휴학을 하면 복학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과 졸병으로 군에 가면 매 맞는다는 말과 다달이 집에서 돈을 가져다 써야 한다는 게 싫었다.

그런 가운데 대학 졸업 후 학훈단(학군단) 장교로 임관하게 되면 그 모든 게 한꺼번에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돼 3학년 때 학훈단에 입단키로 작정했다.

(* 다음 글에 계속)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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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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