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양양군 서면 오색1리 백암마을의 사기막골에 흔하게 발견되는 백자 파편들
정덕수
고려청자에 보다 화려하고 숙련된 장인의 예술 감각이 스며있다면 후대에 나타난 백자는 보다 간결하면서도 편안하다. 이는 시대 현상에 따라 도공들의 의식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 이와 같은 도자기를 빚고 구웠던 분원들은 경기도의 광주와 여주, 이천에 몰려 있었고 그곳만이 도자기를 생산한 장소로 알고들 있다. 그러나 도예를 하는 이들을 통해 강원도에서도 몇 곳 분원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표적으로 양구군에서 생산되는 백자를 '양구백자'라 하여 비교적 높은 가치를 매겼음을 알 수 있다.
양구백자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의 '토산(土産)'(1432)에 나타나 있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르면, 전국의 139개 자기소 가운데 강원도에는 강릉도호부 1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울진현(현재의 경상북도 울진군)에 1곳이 있으며 양구현에 2곳의 자기소가 있다고 한다.
양구 현청(縣廳)의 북쪽 '건천(乾川)'과 방산의 동쪽 '장평(長坪)'이 그곳으로 각각 중풍(中品)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방산의 동쪽 장평'은 지금의 평창군 장평으로 오인할 수도 있겠으나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를 이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구의 현청 북쪽 '저을리(貯乙里)'에는 도기소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자기소와 도기소의 차이를 먼저 짚고 넘어간다. '자기소'는 유약을 입혀 구워낸 사기그릇(청자·백자·분청)을 만들던 가마를 이르고, 도기소는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되던 도기를 굽던 가마를 이른다.
이후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토산조'에는 전국의 자기 생산지 32개소 가운데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양구현'만이 명시되어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두 내용을 종합해 보면 조선 초기엔 139개소에 달했던 자기소가 16세기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줄어 32개소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양구만이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5-16세기 양구지역은 도자기 생산의 요지였음이 분명하다.
이는 도자기를 빚는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흙의 생산과 밀접한 연관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료에서 양구는 도자기 이외에도 '백토 산지'로 기록되고 있어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시킨다.
이 부분에 대해 숙종 27년(1701)의 기록에 양구백토에 관한 내용이 있고, 숙종 35년(1709)에는 "이전에 양구에서 백토를 채취하였으나 힘들고 고되어 다른 지역에서 백토를 옮겨 오도록 하였으나 분원 백자 생산을 책임지던 사옹원에서 양구백토가 아니면 그릇이 몹시 거칠고 흠이 생기게 된다"고 하여 "다시 양구백토를 가져다 쓸 것을 주청"한다.
그리고 몇 년 뒤인 숙종 39년(1713)에도 양구에서 굴취하던 백토를 다른 지역으로 옮겼으나 이 또한 폐단이 많아 대책을 논의한다.
그리고 숙종 40년(1714)년에는 '양구백토'를 굴취하는 과정이 매우 힘든 노역(奴役)이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이후에도 영조 17년(1741), 양구에서 백토 캐는 작업의 폐단을 왕이 개선하도록 명하는 대목이 있으며, 영조 19년(1743)에는 백성들에게 끼치는 민폐를 덜기 위해 사옹원 분원의 낭관(郎官)을 파견하고 상정미(詳定米)를 나누어 주면서 백토를 캐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