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자란다, 동시에 우리는 늙어간다

손녀 향한 할머니·할아버지의 짝사랑

등록 2016.10.11 10:10수정 2016.10.1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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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 지현(志炫)이가 열두 살 배기 5학년이 되더니 지금은 키가 제 할머니를 능가한다. 하지만 등치만 컸지 내가 보기엔 아직 어린 아이다. 일전에는 정보도서관에서 내 도서카드로 손녀가 보고 싶은 책을 빌려와서는 막상 반납 통보가 오니 책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단다. 학교에서 다시 찾아보라고 일러주고 집에서 두루 찾아봐도 책이 보이질 않는다.


영락없이 책이 분실된 터라, 내가 시내 교보문고에 가서 손녀가 잃어버린 책을 다시 구입하고 간 김에 내 책도 한 권 뽑아왔다. 손녀가 내 이름으로 빌린 책이니 반납보상 처리도 내가 도서관에 찾아가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오전에 교보에 갔다가 오후에 도서관에 갔다 오니 그렇게 나의 하루가 훌쩍 가버린다.

만약 집안 식구 중 다른 사람이 그런 일로 내 시간을 빼앗으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테지만, 손녀가 한 일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근데 그러고 며칠 뒤 혼자 책가방을 뒤적이더니 "어! 도서관 책이 여기 있네"라고 태연스럽게 말하는 게 아닌가.

지현 아범이 도서관 책값은 본인 용돈으로 물게 해야 책임감이 생긴다는 말이 생각나서, 내가 "그 책값은 내 카드로 처리했는데..."라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할아버지가 당연히 처리한 일을 뭐 새삼 말하느냐는 식이 되어버려 나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손녀의 그 무심증이 싫진 않다. 참 천진하기도 하고, 할아버지를 그처럼 막역한 사이로 생각해주니 내가 싫지 않은 게다.

온갖 정성으로 자란 손녀, 지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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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다니기 전 손녀 지현의 모습 4세 경 어린이집에 다닐적 손녀의 깜직한 표정 ⓒ 김병하


손녀는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서 아내가 온갖 정성으로 키운 아이다. 그래서 딸 태영이는 어머니에게 딸이 하나 더 생겼다고 제 어머니를 놀릴 정도다. 손녀와 함께 있으면서 난 마누라를 잃어버린 격이 됐다. 그만큼 집사람은 손녀에게 모든 걸 바치고 산다. 손녀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밤산에 가서 일하는 데 전념하더니 밤농사 보담 손녀 농사가 더 귀하다면서 딱 끊어버렸다. 집사람만큼 내가 손녀에게 정성을 쏟는 건 아니지만, 나도 내심 손녀를 무척 좋아한다. 그 방식이 다를 뿐, 그 사랑의 깊이는 서로가 결코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내리 사랑은 짝사랑이라 하지 않는가.


손녀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해외여행을 갈 때도 꼭 세 사람이 함께 간다. 작년 겨울에는 집사람에게 모처럼 딸과 여행하는 기회를 가지랬더니, 결국엔 손녀랑 세 사람이 여행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딸도 우리 내외 못지않게 고모로서 지현이를 끔찍이 사랑한다.

딸이 미국서 공부할 때도 일부러 제 어머니랑 손녀를 그곳에 오게 해서 3개월간이나 함께 생활한 적도 있다. 여행을 하면 손녀가 어릴 적에는 한 방에서 잠을 잤으나, 이제는 덩치가 어른처럼 커서 나는 혼자 딴 방을 사용해야 하는 형편이 됐다. 사실 나이 들면서 나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혼자 자는 게 가장 편하고 좋다. 옆 사람 코고는 소리 들을 일이 없으니 서로가 이래저래 편하다.

손녀는 어릴 적부터 잠자리에 들면 내가 동화책을 읽어주던 게 버릇이 되어 지금도 잘 때는 나를 찾는다. 손녀가 유치원 다닐 때와 초등 저학년까지는 잘 때, 내가 동화책을 읽어주곤 했다. 근데 그 나이가 지나니 이제는 책 읽어 주는 대신에 발마사지를 해 달란다. 자라면서 성장 통이 있는지 발바닥이 아프다고 해서 내가 주물러 준 게 그런 식으로 발전된 게다. 어쩌다가 내가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어김없이 내 손전화 벨이 울린다. 자기가 잘 시간인데 왜 할아버지는 아직 안 들어오느냐고 따진다. 그러면 나는 두 말 없이 금방 들어갈게 먼저 자라고 일러준다.

그리고 어떨 때는 손녀가 잠자리에 들어가서 미처 잠들기 전에 내가 일어서면, 자기 옆에서 자라면서 내 손을 잡는다. 그럴 땐 영락없이 손녀 옆에서 나도 함께 잠들어 버린다. 새벽에 화장실에 갔다가 내 방에 가서 자면, 다음날 손녀는 왜 할아버지는 나랑 함께 자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대충 얼버무리고 넘기지만 그렇게 말하는 손녀가 참 귀엽고 사랑스럽다.

근데 초등 5학년 2학기가 되니 손녀 키가 집사람보다 크고, 밖에서 손녀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구워먹으면 우리보다도 더 많이 먹는다. 외식하면서 손녀가 잘 먹는 걸 보면 우리 내외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속으로 흐뭇해한다.

내가 먼저 잠자리에 드는 횟수가 잦아졌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집사람은 손녀 공부 가르치는 일에 올인한다. 뭐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그 일에 목을 매는 게 집사람의 유별난 스타일이다. 평생을 그리 살아온 사람이어서 누가 뭐라 해도 자기 식으로 하는 게 몸에 베인 사람이다. 나이 들면 누구나 자기 나름의 고집이랄까 말리지 못하는 삶의 스타일이 있기 마련이다.

집사람은 날 두고 "당신은 혼자 책보고 하는 데에 시간을 쏟는 나머지 세상사에 어둡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라고 나무란다. 내 딴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리적(自利的) 삶을 즐기는 데, 집사람은 그게 못마땅한가 보다. 집사람이 보기에 나의 그런 삶이 전형적으로 퍽 '이기적'인 삶으로 비치는가 보다. 살아보니, 귀신은 속여도 마누라 앞에 내 단점은 숨길 수가 없다. 

근데 최근에 와서 손녀가 제 할머니에게 이제는 혼자서 잠자러 가겠다고 한다 해서 내 속으로 놀랍기도 하고 솔직히 좀 서운했다. 때로는 손녀가 공부하느라 늦게까지 있으면, 나는 대개 밤 10시 쯤 해서 내 방으로 가서 잠을 청한다. 한동안에는 내가 잠들어 있으면, 일부러 나를 깨워 함께 가자고 하든지 그냥 내 옆에 자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얼른 일어나 손녀를 데리고 안방으로 간다. 손녀는 자기 방이 있지만, 아직도 잠자리는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내가 먼저 잠자리에 들고, 손녀가 더 늦게 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자 손녀 스스로가 혼자 잠자리에 드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게다. 이렇게 손녀는 자라고 나는 늙어가는 게다. 손녀에게는 혼자 잔다니 고맙다고 말했지만, 집사람에게는 "사실 속으로 난 좀 서운하다"는 걸 고백했다. 손녀의 자라는 모습이 대견하지만, 내가 손녀랑 함께하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는 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큼 노년에 접어든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터.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어쩔 수가 없다.

학년 올라가는 손녀, 안타깝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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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가 초등저학년 때 개나리 꽂 핀 어느 봄날 우리 내외랑 함께 대구 앞산에서 산책하던 중 오느 봄날 아범이 찍어준 사진 ⓒ 김병하


학년이 올라가면서 손녀가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걸 보면서 나는 속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애처롭다. 나는 초등학교 때 야생마처럼 산으로 들로 쏘다니면서 놀았다. 그 덕분에 이 나이에도 심신이 함께 건강한 편이다. 시대가 엄청 달라지긴 했지만, 요즘 애들은 우리 안에 갇혀 사육(飼育)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달라진 시대상황이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게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대부분의 문제는 어른들에게 있다. 사실 지금 아이들이 어른 세대가 되었을 때에는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교과공부가 별로 쓸모없는 게 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지금 손녀 세대가 학교교육을 마치고 사회로 진출할 때의 미래사회가 어찌 변할지 불안하기 조차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집 사람과 손녀 공부문제로 갈등 혹은 견해차를 드러낸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녀교육 열의는 정말 대단하다. 별난 교육열정 덕분에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압축발전'의 성공모델로 주목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데 그 열의가 내 자식만을 위한 이기적인 무한경쟁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내가 보기에 자녀교육문제에 관한한 정답은 없다. 우선 내 자신부터 이 문제에 관한 한 통 뭐라 장담할 수가 없다. 너무 엄격해도 안 되고, 너무 방임적이어도 안 된다. 이런 경우 우리는 '중도'(中道)를 떠 올리게 된다. 원래 '중도'는 중간쯤의 절충이 아니다. 불학에서 '중도'는 쌍차쌍조(雙遮雙照)라 해서, 양극단을 버리면서 동시에 양쪽을 모두 비춘다는 게다. 얼핏 보기에 모순적인 듯하지만, 상황에 따른 융통성을 중시하되 극단을 경계한다. 그러니 정해진 답이 따로 없다는 게다.

손녀 공부문제에 대해 집사람은 전형적으로 간섭형이고, 나는 방임형에 속한다. 관심을 갖는 건 좋지만, 너무 통제하면 짜증난다. 짜증나면 공부는 역효과다. 방임한답시고, 무관심하면 최악이 될 위험이 있다. 관심을 가지되, 통제하지 않는 자녀교육 그게 참 어려운 게다.

원래 교육 중에 으뜸 되는 교육은 말로하지 않는 '무언지교'(無言之敎)다. 도올 김용옥은 나이가 들면서 멀리 크게 내다보고 살란다. 일상의 작은 일에 너무 끄달리지 말고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사는 모습 그리기"를 하랬다.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살기는 우리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삶을 안겨 준단다. 자라나는 손자 손녀에게는 손 씻어라, 공부해라는 등의 일상적 잔소리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애로운 마음으로 던지는 한 마디가 그들의 삶을 훨씬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게다.

근데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애로운 마음이 그냥 솟아나는 게 아니다.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 토양, 마음 샘의 깊이에 따라 그 '자애'(慈愛)가 천양지차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나 자신과 우리 내외를 반추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집사람의 손녀에 대한 애정은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손녀도 "할머니, 사랑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손녀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손녀 공부에 대한 집사람의 집념도 대단하다. 집착 혹은 집념은 본래는 '자애'와 다르다. 오히려 '무념'(無念)이어야 '자애'가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정년 후 아내와 소통은 늘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손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빠른 속도로 자라나고, 우리 내외는 그 반대의 속도로 늙어간다. 그러니 세대 간 교감보다도 이질감이 지수곡선적으로 늘어나기 십상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필수조건으로 건강과 경제, 그리고 의사소통 능력이 중요하다고 흔히 말한다. 늙은이들에게 지독하게 어렵고 불리한 것들만 주요 요건으로 들고 있다. 나이 들수록 건강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마련이고, 경제력도 떨어진다. 나이 들면 고인 물처럼 고집은 더욱 강고해지고 부부 간에도 대화가 잘 되질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맘먹기에 달렸다. 나이 들어 건강이야 전 같을 수 없지만, 아파서 누워있거나 입원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줄 알아야 한다. 혈압 약 등 한 두 가지 약을 아침저녁으로 복용하는 건 그냥 보약 먹는 셈으로 치자.

사실 나이 들면 돈 쓸 일도 줄어드니, 그냥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사는 것만도 다행인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다. 나이 들어 의사소통 기회 혹은 능력이 떨어지면 외롭고 따분하다. 내 경우 대학 강단에서 무려 40년간이나 강의를 하다가 정년 후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지 못하니 얼마동안은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강의 대신 읽고 쓰는 시간을 더 많이 갖는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고 더욱 자유롭다.

정년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마누라와 소통할 기회가 늘어날 것 같지만, 살아보니 그게 아니다. 대개는 제팔 제 흔들기다. 다만 집안 일을 하는 건 조금씩 내 몫으로 늘어난다. 집사람은 여전히 손녀에게 초점을 맞춰 살고, 나는 혼자 자리적(自利的)인 삶에 빠져들고 있다. 서로 불편함은 없지만 상호주관적 소통 기회는 가물에 콩 나듯하다.

근데 세월이 지나면서 성장 가속도를 내는 손녀와 소통기회가 줄어드는 건 우리 내외에게는 좀 다른 문제다. 세대 간 갈등이 늘어나는 건 사회적 문제로 삼으면서 가정에서 세대 간 갈등은 당연한 것처럼 넘기기 쉽다.

사춘기에 접어든 손녀, 노래방에서 확인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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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러시아 여행중 손녀와 집사람이 러시아에서 이르쿠츠크에서 만찬연회 후에 손녀와 집사람이랑 러시아 아가씨들과 함께. 어느듯 손녀 키가 집사람을 능가하고 있다. ⓒ 김병하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반대다. 사회적으로 세대 간 갈등은 거의 자연스러운 추세로 봐줄 수 있지만, 가족 간에 야기되는 세대 간 갈등은 짜증스럽고 화나는 일이다. 최근 연휴에 온가족이 한자리에 만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반주가 거나한 김에 내가 모처럼 함께 노래방엘 가자고 제의했다.

집사람은 내키지 않아 했지만, 함께 갔다. 나부터 먼저 노래를 하고 이어 손녀가 곡을 신청해 노래를 하는 데 속으로 놀랐다. 내가 전혀 모르는 최신 곡을 골라 곧 잘 따라하는 데에 놀랐다. 노래하는 손녀를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녀가 사춘기 소녀라는 걸 실감했다. 내가 손녀에게 이런 노래를 어찌 배웠느냐고 물으니, 유튜브에서 배웠단다. 가끔 귀에 뭘 끼고 혼자 흥얼거리더니 그러면서 익힌 노래인가 보다. 하기야 나도 자랄 땐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몇 번만 들어도 금방 따라 불렀다.

어쩌면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경험한 사춘기를 손녀는 초등 5학년에 이미 입문한 게다. 손녀가 덩치만 크진 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란 걸 노래방에서 확인한 게 내게는 하나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내 노래를 손녀가 모르듯이 손녀가 하는 노래를 나도 전혀 모른다. 서로 코드가 다른 게다. 이 다른 코드를 서로 어떻게 맞춰 소통할 것인가가 남은 숙제다. 결코 만만찮은 숙제다. 정답이 없는 문제다.

내가 보기에 집사람이 손녀 공부 가르치고 간섭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선 가르치는 내용도 버거워지고 손녀가 고분고분 따라하는 것도 거의 정점을 찍은 것 같다. 내가 방에서 들어보면 손녀가 "할머니가 틀렸어!"라며 대들곤 한다. 그래도 손녀 공부의 고삐가 아직은 할머니 손에 쥐어져 있는 듯하지만, 그 고삐가 점차로 느슨하게 소진될 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남아 있어야 할 것은 손자 손녀를 향한 자애로운 마음뿐이다. 그게 조건 없는 짝사랑이자 텅 빈 마음이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질 않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손녀를 향한 마음 씀이 곧 노년기에 접어드는 집사람과 내 삶의 공부일 터. 우리의 삶에서 공부는 그 끝이 없다.
#손녀 #할아버지 #내리사랑 #초등학교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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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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