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에서 도전한 무농약, 무퇴비, 무비닐 농사 중에 볏짚으로 두둑을 멀칭
녹색전환연구소
첫 근무지는 '희망청'이란 곳이었다. 당시엔 청년이 사회적 화두가 되어 많은 얘기들이 나오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정작 청년 당사자들이 뭐라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얘기가 별로 없어서 그들 스스로 이야기하고 액션을 취하는 게 필요하다 싶어 만들어진 곳이어서 청년 문화사업 관련된 일을 주로 했었다.
그곳에서 '마포는 대학'처럼 마을과 지역을 바탕으로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와 주변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태어난 이후 줄곧 도시에서 살았음에도 도시가 내 동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다. 출퇴근 시간의 지옥철을 벗어나 내가 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청'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 그럼 농산물 유통을 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생생농업유통'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처음엔 전주의 사회적기업 '이음'에 들어갔다. 전주는 소도시여서 차 타고 10분 정도 나가면 다 논밭일 정도로 자연과 가깝고 문화적 인프라가 많아서 살기 좋았다. 그곳에서 하는 일이 농촌에서 하는 문화 사업과 마을 사업이어서 인근 지역을 차로 많이 돌아다녔다. 에어컨도 안 나오는 달달거리는 트럭을 타고 산이며 하늘이며 구름이며 음미하면서 달려가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내가 그동안 본 것 중에 가장 큰 하늘을 거기서 봤다. 그렇게 전주 생활을 즐기다가 김가영 대표가 제안해서 함께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 김가영 대표와는 어떻게 같이 사업을 하게 되었나."대학 때 같은 과 친구였다. 그땐 별로 안 친했는데 내가 전주에 내려와 농촌에서 일하면서 친해졌다. 김 대표는 대학시절에도 지리산 농산물 유통업을 하느라 바빴다. 나는 대학 때 탈춤 동아리를 열심히 했는데, 한참 탈춤 연습하다가 수업에 늦어서 교실 맨 뒤에 앉아 숨 돌리고 있으면 누가 조용히 들어와 내 옆에 앉는 거다. 그래서 쳐다보면 김 대표였다. 그러다 곧 전화가 오면 다시 조용히 사라지고... 그런 모습을 보며 쟤는 뭐지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김 대표도 당시엔 나를 보며 지하실에서 탈춤이나 추는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음'에서 했던 일이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거였고 그러다 보니 농촌 구석구석을 많이 돌아다녔다. 탈춤 출 때는 탈춤 추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 보이듯이, 농촌에 사니까 농사 짓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농사도 한번 지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김 대표가 전북 완주에서 고추농사를 지어보자고 제안해 왔다. 돌부터 골라내야 하는 척박한 땅이었지만 주변에서는 어떻게 농사 짓는지 잘 보고 눈치껏 따라하면서 고추농사를 지었다. 농사짓는 과정 자체가 다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어서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김 대표와 함께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시작은 고춧가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