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상식도, 민주주의도 무너졌다. 참담했다. 최근, 아니 몇 년 내내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태들을 보며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참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보기가 왜이리 어려운 걸까. 가슴 아픈 일이 얼마나 더 일어날지, 시민들의 삶이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는다.
비선실세 논란이 터지자, 때맞춰 개헌 논의가 시작됐다. 여기서 1987년이 떠오른다. 1987년, 시민들이 비민주적인 정부를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새로운 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의회 세력이 건설했다.
그리고 2016년,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라 불리며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부패공화국이 됐다. 기득권은 해체되지 않고 재편됐을 뿐이다. 기득권을 해체하지 못하는 개헌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이미 증명됐다.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들이 주체가 돼 진행하는 개헌은 사람만 바꾸는 것에 그칠 것이다.
기득권 주체의 개헌이 우려되는 이유는, 그들은 현재 시스템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이들이며 그 권력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제도에 관심이 없거나, 막을 생각밖에 없다.
그들은 언론, 재벌, 정치계를 장악하고 입맛대로 국민의 삶을 주무를 것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권력형 부패와 독주는 가능할 수밖에 없다.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의제나 가치 역시 정치권에서 다뤄지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개헌을 한다면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정치 영역에 시민들의 참여를 아주 강력하게 막아놨다. 일단 헌법에 국민발의에 관한 조항이 없다. 오직 대통령만이 국민투표를 발의할 수 있다. 그것도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에 대해서만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이 추상적인 명시에 대하여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어차피 대통령이 발의하지 않는 이상 국민투표는 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스위스의 경우 국민 10만 명이 서명하면 정책에 관하여 국민투표를 시행해야 하며, 헌법개정안도 낼 수 있다.
개헌 과정에서도 국민의 참여가 막혀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지금 헌법에서는 헌법개정안 발의는 대통령과 국회만 할 수 있다. 스위스와 달리 대한민국 국민은 헌법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며, 의견을 제시할 통로도 없다. 국민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는 것이다. 개헌은 정치개혁과 비민주적인 체제에 분노한 시민들의 참여를 전제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도 그때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국민발의, 국민투표 등의 제도는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상식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 명시돼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로부터 나온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지역 기반의 거대 양당들이 독점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국민의 다양한 선호와 이익이 반영되지 않고, 권력형 부패와 독주가 '가능한' 체제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이렇다. 시민들의 의사가 비례적으로 대표나 국가에 반영되는 것, 다양한 정치 주체가 서로를 감시하며 권력형 부패, 독주가 불가능한 구조. 민주주의는 정말 실현될 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삶의 방식이자 습관이어야 한다.
우리는 정권교체, 행복한 국가를 원한다. 그런데 지금의 헌법은 물론 선거제도부터가 국민, 소수정당들, 사회적 약자들의 정치 참여가 원천적으로 막힐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돈이 없으면 선거에 나가기도 힘들고, 비례성도 보장되지 않는다. 지역 기반, 거대 양당 독과점체제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다양한 정치주체들이 정말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고, 결정할 수 있는 전제로서 선거제도를 개혁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권을 헌법에 명시할 것을 요구한다.
지난 12일에 서울광장에서 진행된 민중촐궐기에 100만 명이 함께 현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100만 명이 청와대를 둘러싸고 소리를 질러도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다. 우리는 분노를 이어가며 힘을 모아 "퇴진!"을 외치는 동시에 본질적인 문제,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바라는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인지 같이 생각하고, 그에 필요한 제도를 요구해야 한다. 이제 막는 걸 넘어 만들어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